그래픽=이진영

2015년 7월 서울 사무실 문을 연 글로벌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넷플릭스가 올해로 한국 진출 10년을 맞는다. 넷플릭스가 이듬해 1월 첫 스트리밍 작품을 선보일 때만 해도 한국 드라마와 영화 콘텐츠 업계에 불어닥칠 변화를 예측한 이는 드물었다. 아시아와 중동에 국한됐던 한류가 전 세계의 한류로 확고하게 자리 잡게 한 1등 공신은 넷플릭스였다. 그러나 넷플릭스는 한국 미디어 산업이 풀어야 한 어려운 과제도 던졌다. 콘텐츠 제작비 급등으로 인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국내 영상 산업은 혹독한 시련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넷플릭스가 한국 콘텐츠 산업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한류의 전 세계적 확산이다. 2016년 60여 편에 불과했던 넷플릭스의 한국 관련 콘텐츠 수가 2018년 550여 편으로 늘어나면서 한국 콘텐츠는 본격적으로 세계 각국 TV 브라운관과 휴대전화 화면을 차지했다. 넷플릭스 시청자는 7억명으로 추산되는데 이 중 80%가 적어도 한 번 이상 한국 콘텐츠를 접했다. 넷플릭스는 한국 콘텐츠를 최대 30개 언어로 세계 각국에 공급하고 있다. 넷플릭스가 해마다 제작하는 한국 오리지널 콘텐츠 수도 2018년 4개에서 올해는 32개로 늘어날 전망이다.

그래픽=이진영

넷플릭스의 글로벌 영향력을 처음으로 증명한 작품은 ‘미스터 션샤인’이다. tvN에서 방영된 드라마를 2018년 사들여 공개하자 그때까지 한류 불모지나 다름없던 미국에서 ‘미스터 션샤인 팬클럽’이 만들어졌다. 유럽 반응도 뜨거웠다. 영국에선 드라마 이해를 돕기 위해 대학에 한국사 특강이 개설됐고 프랑스에선 한복을 응용한 ‘미스터 션샤인 컬렉션’이 발표됐다. ‘킹덤’ ‘오징어 게임’ ‘더글로리’ 등이 연이어 넷플릭스 세계 시청률 1위에 올랐다.

방송통신위원회의 지난해 ‘방송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2018년 4억8000만달러였던 한국 영상 프로그램 수출 규모는 2023년 10억달러가 돼 두 배 이상으로 커졌다. 그 사이 미주·유럽·오세아니아·아프리카 시장이 새로 개척되면서 2018년 조사에서 66%를 차지했던 아시아 시장 비율이 33%로 줄었다. 넷플릭스가 일으킨 한류 효과다.

넷플릭스에 이어 디즈니+와 애플TV+가 한국에 진출하면서 글로벌 OTT끼리 한국 콘텐츠를 두고 확보 경쟁을 벌였다. 이정재·이병헌·송혜교는 국제적인 스타로 발돋움했다. ‘사랑의 불시착’에서 손예진이 사용한 화장품, ‘오징어 게임’에서 배우들이 먹던 라면이 세계적 브랜드로 떴다. 한국어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세계 최다 가입자를 둔 미국의 외국어 학습 앱 듀오링고 내 한국어 학습자 수는 550만명에 이른다. 앱에서 일곱째로 학습자가 많은 국제 언어가 됐다.

그러나 막강한 자본력을 앞세운 넷플릭스는 두 얼굴의 지배자임이 드러났다. ‘사전 제작’과 ‘제작비 플러스 알파’를 제시하며 한국 콘텐츠 시장을 단시간에 장악했다. 디즈니+와 애플TV+가 한국에서 고전하는 것을 본 HBO와 패러마운트가 한국 진출을 포기하면서 한국은 넷플릭스 천하가 됐다. OTT 간 한국 콘텐츠 확보 경쟁으로 인해 만들어졌던 ‘콘텐츠 공급자 우위 시장’도 사라졌다. 오히려 한국 제작사들 사이에 연간 10편 내외를 만드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제작사로 선택받기 위한 경쟁 시장으로 바뀌었다.

넷플릭스는 한국 드라마 제작자들이 전에는 상상도 못 한 거액의 제작비를 쏟아붓는다. 정확한 액수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오징어 게임’ 시즌2는 회당 160억원(총 제작비 1000억원), ‘폭싹 속았수다’는 회당 37억원(총 600억원)이 투입된 것으로 알려졌다. 주연급 배우의 출연료도 회당 3억~4억원, 최고 10억원까지 치솟았다. 드라마에 이런 거액을 쓸 수 있는 곳은 넷플릭스밖에 없다. 2013년 화제작 ‘별에서 온 그대’는 톱스타인 김수현과 전지현을 출연시키고도 회당 제작비가 5억원이었고, 공유와 김고은이 주연한 ‘도깨비’는 8억원이었다. 배우들도 넷플릭스 출연을 가장 선호한다. 내년 공개 예정인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천천히 강렬하게’엔 송혜교·공유·설현·차승원·이하늬 등 거물이 총출동하고 제작비도 800억원 가까이 쓴다.

제작비가 치솟으며 드라마 제작과 편성이 함께 줄어들고 있다. 2012년 한 해 91편이던 지상파 방송 드라마가 2023년엔 32편으로 급감했다. 대형 제작자와 주연급 배우는 잘나가는 반면, 제작 기회를 잡지 못한 중소 제작자와 출연 기회가 사라진 조연급 배우는 생존을 위협받는 양극화가 뚜렷해지고 있다.

지상파 방송의 OTT 예속 움직임도 보인다. SBS는 올해부터 자체 제작한 드라마를 넷플릭스에도 공급한다. MBC는 디즈니+ 오리지널 드라마 ‘무빙’을 이미 방영한 데 이어 ‘카지노’까지 편성하려 했다가 “우리가 OTT의 재방송 전문 채널이냐”는 내부 반발을 샀다. 드라마의 빈자리는 예능 차지가 됐다. “밖에서만 잘나갈 뿐, 몇 년 내로 K드라마 생태계가 붕괴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쏟아진다.

넷플릭스가 사실상 독점적 지위를 구축하면서 다른 영상 콘텐츠 산업도 비명을 지르고 있다. 유료 방송(케이블TV·위성방송·IPTV)도 OTT에 밀려 찬바람을 맞고 있다. 2009년 13%에 이르던 국내 유료 방송 가입자의 연간 증가율이 해마다 줄어들어 2023년에는 사상 처음 0%대로 추락했다. 사실상 성장을 멈춘 것이다.

한 해 2~3편씩 ‘천만 영화’가 탄생하던 한국 영화도 깊은 부진의 수렁에 빠졌다. 극장가에선 “올해는 천만 영화가 안 나올지도 모른다”는 우울한 전망도 나온다. 요즘 젊은이들은 극장을 “인터넷 못 하고 휴대전화도 쓸 수 없는 불편한 장소”로 여긴다. 그런 불편을 참을 수 있을 만큼 특별한 시각 체험을 주는 영화만 극장에서 보고 나머지는 집에서 OTT로 감상하는 방식이 관람의 뉴 노멀로 자리 잡았다. 부산영화제가 지난해 사상 처음으로 넷플릭스 영화 ‘전,란’을 개막작으로 택했다. 박광수 영화제 이사장은 “대중의 호응이 있어야 영화관도 영화제도 오래갈 수 있다”고 했다. 스크린만 고집할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고 OTT와 공존을 모색하는 신호라는 해석이 나온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K드라마로 만들어 미국 시장 두드려야”

'애프터 넷플릭스' 저자 조영신 /김지호 기자

“한국 콘텐츠가 190여 해외시장에 진출한 것은 누가 뭐라 해도 넷플릭스 덕분입니다. 그러나 넷플릭스를 통해야만 해외시장에 나갈 수 있다는 제약이란 뜻이기도 합니다.”

올해 초 출간된 책 한 권에 미디어 업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조영신 조영신미디어산업연구소장이 펴낸 ‘애프터 넷플릭스’다. 지난 10년을 한국 영상 콘텐츠 산업의 글로벌 OTT 적응기로 규정하면서 한국 콘텐츠 업계가 풀어야 할 향후 과제를 국내외 사례를 들어가며 설명했다. 조 소장은 “한국 제작사들의 콘텐츠 제작 능력은 이미 세계가 인정하고 있다”면서 “그런 콘텐츠가 넷플릭스의 비영어권 시장 위주로 소비되고 있는 현상을 타개해야 지금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했다. “넷플릭스 가입자 분포를 보면 영어권이 70%이고 아시아와 남미를 포함하는 비영어권이 나머지 30%입니다. OTT의 진검승부가 벌어지는 곳은 북미입니다.” 그는 ‘북미의 아시아계 시청자’를 타깃으로 설정하고 그들이 볼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 넷플릭스뿐 아니라 HBO, 아마존프라임 등 다양한 OTT에 공급할 길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문제는 2020년 기준, 0.7%에 불과한 미국 내 한국 인규 규모로는 시장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 조 소장은 “미국에서 히스패닉 인구가 10%에 이르자 방송국과 OTT에서 히스패닉 방송을 편성하기 시작했다”며 “현재 7.2%인 미국 내 아시아 인구가 10%에 도달하는 10년 뒤쯤을 대비해 한국은 아시안 콘텐츠를 제공하는 사업자로 변신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아시아 콘텐츠 강국인 일본과도 협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은 애니메이션 강국이지만 이를 드라마로 만드는 능력은 우리보다 떨어집니다. 한국의 드라마 제작 능력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을 극화해 글로벌 OTT에 공급하면 서로 윈윈할 수 있습니다.” 국내에선 중·소 규모 제작자들이 저예산 드라마를 만들면서 넷플릭스와 공존을 모색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실제로 출연료 비싼 톱스타 대신 신인 배우를 기용해 만든 드라마를 티빙같은 토종 OTT에 공급해 성공한 사례가 나오고 있습니다. ‘선재 업고 튀어’는 tvN에 먼저 공급한 뒤 흥행에 성공하자 국내 OTT인 티빙뿐 아니라 일본의 U-NEXT에 이어 넷플릭스까지 공략했습니다. 배우들도 유명해졌고요.” 조 소장은 “토종 OTT가 살아남아야 K드라마 생태계가 유지되고 그래야 글로벌 OTT를 통해 한류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