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출근길에 봤던 서울시청의 대형 현수막이 논란 끝에 철거됐다. 철거 이유를 공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서울시가 ‘대학 서열화’ ‘학벌주의’를 조장한다는 비판이 나온 뒤였다. 현수막은 서울시가 만든 교육 플랫폼 ‘서울런’ 지원을 받은 782명이 대학에 합격했다는 내용으로 ‘서울대 19명, 의·약학 계열 18명’ 등 진학 실적이 나열돼 있었다. ‘교육 격차를 해소할 수 있는 사다리’ 정책이었는데, 현수막에선 정반대로 ‘줄 세우기’가 강조돼 버렸다.
공공기관이 내건 ‘합격 현수막’이라 논란이 더 컸을 뿐, 지금도 학교, 학원 가리지 않고 현수막 경쟁이 펼쳐진다. 과거에도 그랬다. 지방 한 고등학교 입학 때, 학교 외벽 대형 현수막엔 이른바 SKY 대학, 의·치대, 한의대 등 합격 실적이 빼곡했다. 알고 보니 학교는 재수·삼수생 이상까지 일일이 조사해 현수막을 채웠다. 그때는 ‘나도 졸업 때 저기 포함될 수 있을까’ 생각했을 뿐, 현수막이 문제라는 생각은 못 했다. 그 현수막은 다음 입시 결과가 나올 때까지 1년 내내 걸려 있었다.
괜한 현수막 욕심을 냈을까. 대학 입시가 끝난 뒤 다소 민망한 현수막이 걸렸다. 시골 마을에서 오랜 이웃들이 축하 현수막을 마을 입구 버스 정류장 앞에 걸었다. 근처 동네까지 포함해 유일한 어린이집을 운영했던 이웃집에서도 현수막을 걸었다. ‘○○어린이집 출신’. 버스 타고 현수막 앞을 지날 불특정 다수를 생각하니 아찔했다. 출신 고교도 아니고 어린이집을 강조하는 이상한 현수막으로 오해 사기 십상이었다.
고2 때까지 다닌 학원에서도 ‘혹시 현수막을 걸어도 되겠느냐’고 연락이 왔다. 1인 원장, 작은 규모 학원으로 공부는 강조했지만, 성적으로 차별은 하지 않는 곳이었다. “이런 부탁을 하게 돼 민망하지만…”이라고 말을 흐렸다. 당시 학원 운영이 어렵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터라 “당연히 그러셔도 된다”고 했다.
이번 서울시의 합격 현수막도 선의(善意)에서 시작했지만 배려가 부족했다. 시골 이웃, 어린이집 원장님, 학원 원장님의 현수막도 선의였지만, 누군가에겐 정반대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고등학교 한 친구는 졸업식을 앞두고 “너는 저기 있고 나는 없네”라고 했다.
결국 합격 현수막을 보면 대부분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일종의 ‘축하’라는 이유로 방관하고 있는 게 아닐까. 국가인권위원회는 이미 2012년에 전국 교육청에 ‘합격 현수막’ 자제를 위한 지도·감독이 필요하다고 전달했다. “특정 학교 합격 홍보물 게시가 우리 사회 학력·학벌 차별의 핵심적 원인은 아니지만, 관행적으로 이뤄지면서 차별적 문화를 조성할 우려가 있어 개선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바로 달라진 건 없었다. 인권위의 첫 권고 바로 다음 해였던 2013년 모 광역시에는 합격 현수막 7838개가 걸렸다. 학교당 1년 평균 27.3개였다고 한다. 인권위는 2015년 재차 ‘합격 현수막 게시 관행 개선 촉구’ 성명을 냈다.
이후 10년간 고등학교에서 합격 현수막은 그래도 줄었다고 한다. 다만, 여기저기 번졌을 뿐이다. 지금도 몇몇 로스쿨은 ‘검사 임용 전국 ○위’ 같은 현수막을 건다. 정작 축하 대상은 없는 보여주기식 합격 현수막 릴레이는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