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밑바탕에 ‘보이지 않는 헌법’이 있다. ‘보이지 않는 헌법’이 없다면, 헌법이란 그저 종이에 적힌 죽은 텍스트일 뿐이다. 저명한 헌법학자 트라이브(Laurence Tribe)가 말하듯 헌법이란 ‘보이지 않는 헌법’의 바다에 떠있는 작은 배와 같다. 결코 어려운 말이 아니다. 명문화된 헌법 없이도 법치가 이뤄질 수 있지만, 헌법이 있다 해서 법치가 저절로 실현될 까닭이 없다.

이재명(앞줄 오른쪽부터) 더불어민주당, 윤석열 국민의힘, 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가 19일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삼의사묘에서 열린 매헌 윤봉길 의사 순국 89주기 추모식에 참석해 있다./뉴시스

‘보이지 않는 헌법’이란 한 사회의 역사적 경험, 정치적 지혜, 축적된 판례, 시민사회의 감시, 매스컴의 비판, 전문가 집단의 자문, 공동체의 윤리 의식, 개개인의 도덕적 판단력 등, 법치가 꽃필 수 있는 한 나라의 문화적, 전통적, 정치적, 이념적 토양이다. 국민 상식, 인문 교양, 집단 지성, 그 뭐라 불러도 좋다. 주체적으로 사유하고, 냉철하게 판단하고, 예리하게 비판하고, 삼엄하게 감시하는 공민(公民·공화국의 시민들)이 없다면 법치는 파괴되고, 민주주의는 사망한다.

법치가 왜 무너지는가? 바로 ‘보이지 않는 헌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법치란 다수 공민이 권력을 감시하고 정책을 검토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 법치를 실현하는 주체는 한 줌 권력자들이 아니라 다수의 깨어있는 공민이다. 다수 공민이 감시와 비판을 멈추면, 권력자들은 제멋대로 헌법을 악용해서 ‘보이지 않는 헌법’을 허물어뜨린다.

‘보이지 않는 헌법’을 작동시키는 방법은 무엇일까? 달리 묘책이 있을 순 없다. 지금껏 모든 사회가 노력해왔듯 대중 교육을 실시하고, 시민사회를 형성하고, 언론 자유를 확대하고, 열린 토론을 이어가고, 전문가 집단을 양성해가는 수밖엔 없다. 그럼에도 가장 효율적인 방도가 있다면, 바로 공명정대한 선거를 통해 낡고, 썩고, 무능하고, 부패한 구태의 권력 집단을 퇴출하는 정공법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선거란 ‘보이지 않는 헌법’이 그 장엄한 모습을 드러내는 ‘진실의 순간(moment of truth)’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보이지 않는 헌법’을 잠재우기 위해서 권력자들은 갖은 모략과 술수를 쓴다. 선거 직전에 현금을 살포하고, 엉터리 복지 정책을 공약한다. 선거 관리를 제 편에 맡기고, 공영방송을 장악한다. 가짜 뉴스를 퍼트리고, 거짓 소문을 흘린다. 지방선거에 개입하고, 흑색선전에 몰두한다. 근거 없는 폭로전, 도를 넘는 비방전, 유치한 편 가르기, 저열한 낙인찍기, 가십성 외모 품평, 혐오증적 인신 비하…. 정책 대신 정략이, 경쟁 대신 암투가, 정당정치 대신 파벌 싸움이 판을 친다.

그 치졸한 정치판의 이전투구는 판에 박힌 선거 전술이다. 자기편의 약점을 감추기 위해 상대편의 허점을 공격하는 수천 년 된 마타도어다. 대통령 선거라면 논리와 경륜을 갖춘 후보자들이 정책과 비전으로 진검승부를 해야 마땅하지만, 파괴적 포퓰리즘, 옐로 저널리즘, 음험한 정치 공작, 선정적 흥행 몰이만 난무한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망가뜨리는 반민주적인 망동(妄動)이다. 바로 이번 대선이 한국 헌정사 최악의 졸작이라 한다면 멀리 사는 방외인의 야박한 평가일까?

디지털 혁명 이후 전 세계에서 권력 집단의 대중 감시와 정보 조작 기술이 갈수록 고도화되고 있다. 개개인의 얼굴, 홍채, 정맥, 음성, 서명, 걸음걸이까지 모두 생체 인식의 빅데이터로 집적되어 빅브러더의 수퍼컴퓨터에 입력되는 세상이다. 오웰의 상상을 넘어서는 디지털 전체주의가 해일처럼 민주주의를 삼키기 직전이다. 권력자들은 틈만 나면 그럴싸한 명분을 만들어 개개인의 자유를 옥죄고 권리를 제한하려 든다. 진정 현대 민주주의의 총체적 위기인가?

권력 집단의 권능이 더욱 거세지기에 공화국의 시민들이 직접 권력을 심판하는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헌법’을 되살려야만 한다. 공민은 누구나 머리와 가슴에 ‘보이지 않는 헌법’을 품고 있다. 그 헌법의 명령에 따라 합리적 이성과 전문가적 식견을 발휘할 때다. 거짓 선동과 헛된 공약으로 유권자를 기만하는 교만한 권력 집단에 투표의 철퇴를 내려야 한다.

선거의 칼날로 썩은 권력을 도려내야만, 차기 권력자는 ‘보이지 않는 헌법’의 두려움을 깨닫고, 살얼음 딛듯 벌벌 떨며, 국가의 제1 공복(公僕)으로 거듭날 수 있다. 민주 선거는 무도한 권력을 내치는 공공의 무기이다. 그 비장의 무기로 그들을 방출하지 못하면, 그들이 우리를 노예처럼 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