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는 여성이 ‘출산 기계’로 전락한 세상을 그린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전쟁, 환경오염, 질병으로 출생률이 급감한 혼돈을 틈타 가부장 국가 길리어드는, 여성을 임신 가능 여부에 따라 4계급으로 나눠 통제하고 억압한다. 이 나라에서 여성은 ‘다리 둘 달린 자궁’에 불과하며 종족을 번식시키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아기를 낳지 못하면 독극물 처리장으로 끌려가 끔찍한 노동형을 살다 폐기된다.
‘시녀 이야기’는 1985년에 발표됐지만, 그 배경은 21세기다. 맨부커상 두 차례 수상에 매년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작가는 21세기에도 여성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지옥이 펼쳐질 수 있음을 맹렬히 풍자했다. 백인 남성 우월주의에 낙태 금지법 부활 등 여성 혐오를 일삼은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이 소설이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며 1000만부 이상 팔려나갔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탈레반이 재점령한 아프간에선 여성들이 학교에서 쫓겨나 다시 부르카를 쓰기 시작했고,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여성은 또다시 강간 살인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
“확립된 질서는 하룻밤 사이에 사라질 수 있다”는 애트우드의 경고처럼 여성 인권은 한순간에 퇴보할 수 있다. 대한민국이라고 예외일까. 성차별에 반대하는 페미니즘이 불온한 사상으로 매도되는 가운데, 대통령 인수위원회가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고 저출산·인구 정책을 중심으로 한 미래가족부 신설을 구상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을 때 두 귀를 의심했다. ‘여성의 권익’을 뺀 자리에 ‘저출산과 인구’를 장착한 발상 때문이다. 이는 새 정부가 여성을 출산의 도구로 본다는 해석과 의심을 낳게 한다.
실제로 윤석열 당선인은 “페미니즘이 저출산의 원인” “여성에 대한 구조적 차별은 없다”는 발언으로 그를 지지하던 여성 유권자들마저 놀라게 했다. 애트우드의 소설 ‘시녀 이야기’가 바로 그런 논리다. 전체주의 국가 길리어드는 출생률 떨어지는 원인이 “글을 읽고 공부 많이 하고 사회생활을 하는 여성들, 그리고 페미니스트들 탓”이라고 여겨 이들을 응징한다. 여성에게 허락된 ‘과도한’ 권익이 사회를 분열시키고 출생률을 떨어뜨려 국가를 무너뜨린다고 믿는다. 과연 그럴까.
저출산은 국가의 미래를 좌우하는 절체절명의 문제다. 그러나 수백조원을 쏟아붓고도 출생률이 제로(0)를 향해 치닫는 것은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자아가 강해진 여자들, 이기적인 페미니스트들 탓이 아니다. 누구 탓인가? 공교육이 무너져 사교육비가 치솟아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해온 정치의 잘못이다. 출산이 곧 경력 단절로 이어지는 고착화된 성차별 구조를 남 일처럼 눈감아온 정치 탓이다. 경제를 망가뜨려 그나마도 작아진 파이를 남녀가 물고 뜯고 미워하게 만든 정치 탓이다.
저출산은 여성의 문제이자 교육과 경제, 복지의 문제다. 아이를 낳기만 하면 국가가 키운다는 결단으로 강력한 컨트롤타워가 주도해야 풀 수 있는 복잡한 함수다. 여기서 중요한 열쇠는 ‘여성적 관점’이다. 아이를 낳는 주체가 여성이기 때문이다. 임신으로 차별받지 않고 출산과 독박 육아로 경력이 단절되지 않는 ‘시스템’ 구축은 그래서 중요하다. 20대 후반 70%였던 여성 고용률이 30대 중반에 들어서면 50%대로 추락하고, 남성 고용률은 90%로 치솟는 지표는 왜 바뀌지 않는 걸까. 인구 절벽 위기에 몰렸던 스웨덴이 출생률 2%를 돌파할 수 있었던 비결은, 여성이 일과 가정을 병행하도록 공보육·공교육 시스템이 작동하고 기업들이 ‘워라밸’을 최고 가치로 내세우면서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이 급속히 올라간 데 있다. 이에 대해 스웨덴 남자들이 분개했다는 말도, 성평등 정책 부서가 폐지됐다는 말도 들어본 적 없다.
최근의 ‘이대남 현상’이 지난 20년 여성 정책이 쌓아온 공과(功過)를 통렬히 성찰하게 한 건 맞는다. 그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선거 전략에 이용할 수도 있다. 그런데 거기까지여야 한다. 구조적 성차별이 사라졌다는 어떤 자료나 통계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여가부의 소명이 다했다”고 주장하는 건 억지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일하는 여성’인 당선인의 아내와 인수위원장 아내에게 물어보라. 구조적 성차별이 과연 사라졌는지.
대통령 인수위는 지난 대선에서 2030 여성들이 ‘팔을 자르는 한이 있어도’ 이재명 후보로 막판 결집한 이유를 곱씹어야 한다. 성폭력 무고죄 강화 공약을 내건 윤 후보가 당선된 다음 날, 여성들의 호신용품 구매가 급증했다는 해프닝은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