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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근 민주당 원내대표는 참모들이 준비한 발언 자료를 많이 고친다고 한다. 발언에 흐트러짐이나 사고가 없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지난달 16일 이재명 대표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 사실이 알려지자 그는 원고 없이 “국민과 견결(堅決)하게 싸워나갈 것”이라고 했다. 즉흥 발언이었다. ‘견결’이 낯설었던 현장 기자들은 ‘박홍근, 격렬하게 싸울 것”이라는 속보를 썼다. 당 공보국은 “격렬이 아니라 견결”이라며 수정을 요청했다.

더불어민주당 박홍근 원내대표가 16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연합뉴스

기자들의 문해력 탓일까. ‘견결하다’는 의지나 태도가 굳세다는 뜻으로 국립국어원 사전에도 나와 있지만 일상에선 안 쓴다. 보통 ‘굳세다, 꿋꿋하다’라고 한다. 남북 언어 차이를 가르치는 ‘우리말 통일사전’에는 ‘견결하다는 굳세다는 뜻의 북한 말’로 돼 있다. 즉흥 발언에서 견결하다고 말한 것으로 짐작하건대 일상에서도 사용하는 것 같다. 전대협 간부를 지낸 다른 중진은 자신을 ‘견결하다’고 평했다.

북한 헌법에는 “후대들을 사회와 인민을 위해 투쟁하는 견결한 혁명가로 키운다”는 문구가 있다. 조선중앙통신은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이 대만을 방문하자 “영토 완정을 견결히 수호하려는 중국 정부를 지지한다”고 했고, 김정은도 김정일 사망 7주기에 “장군님의 유훈을 관철하기 위해 견결히 투쟁해왔다”고 말했다. 탈북민은 “북에선 견결하다는 말을 모르면 간첩이지만, 남한에선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우리와 다른 뜻으로 사용하는 북한 말 중 하나가 ‘총화’다. 전체 화합을 뜻하는 총화는 ‘총화단결’ 이럴 때 쓴다. 그러나 북에서는 ‘사상총화’ ‘생활총화’처럼 상호 비판, 자아 비판을 뜻한다. 대학 때 선배들이 총화 시간을 갖자고 해 술 마시는 단합회인 줄 알았는데 밤새워 반성 토론을 했다. 그 뒤로 ‘총화의 자리’를 멀리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 출신의 한 의원은 라디오에서 북의 대남 정책 변화를 설명하며 “대남 기관들의 총화로 보인다”고 했다. 북한식으로 정확하게 쓴 것이다.

주사파 이야기가 아니다. 기자가 만난 상당수 운동권 정치인은 혁명을 일으켜 북한과 연방제 통일을 하겠다는 과거 생각에서 멀어졌다. ‘강철서신’의 김영환처럼 사상 변화를 공개적으로 밝히면 좋겠지만 이를 강요할 필요도 그럴 수단도 없다. 대신 자신의 말과 정책을 통해 변화를 증명하면 된다. 그런데 아직도 북핵을 자위권으로 이해하고, 한미일 안보 협력을 친일·매국으로 규정하고, 북한 인권을 외면하는 모습에서 진화하지 못한 ‘퇴화 흔적’을 읽는다. 견결,총화 같은 말도 이런 ‘흔적’이다. 변한 것도 안 변한 것도 아니고 어정쩡하다.

북한 문제처럼 ‘반란표’ 없는 또 하나가 노동이다. 민주당은 아직도 ‘탐욕스러운 자본과 힘없는 노동’이라는 이분법에 갇혀 있다. 그래서 비정규직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2년마다 비정규직 대량 해고를 가져온 악법을 만들었다. 이 문제를 알면서도 비정규직법 개정에 나서자는 ‘반란표’가 없다. 비정규직이 일할 권리를 보장하고 기업의 숨통도 틔워주는 일인데도 말이다. 민주노총 대변인 역할에 매몰돼 2030들이 왜 새로운 노조 운동에 나섰는지 이해할 수도 없다.

이 대표 체포 동의안 표결에서 ‘반란표’가 쏟아졌다. 그러나 이는 내부 권력투쟁일 뿐 변화의 몸부림이 아니다. 친명, 비명 대립은 과거 여권의 친이, 친박처럼 그들만의 권력투쟁이다. 집권을 위해 변화하려면 화석처럼 굳은 북한과 노동에서 이탈표와 돌연변이가 쏟아져야 한다. 그간 돌연변이가 없었던 게 아니다. 그때마다 변절자로 몰아 추방했다. 고민하지 않는 자들이 속 편하게 사는 방법이 생각의 감옥에서 탈주하려는 사람을 변절자로 낙인찍기다. 최근 문재인 정부 핵심 참모가 “김정은이 6•25 남침에 대해 사과하는 용기를 내라”는 글을 썼다. 그러나 이 ‘반란표’는 민주당 진영에서 아무 호응도 얻지 못했다.

다윈의 진화론 핵심은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이 아니라 돌연변이다. 강하거나 다수종이어서 산 게 아니라 변해서 살았다. 안 봐도 뻔한 정당은 뻔하게 진다. 이 말은 여당에도 적용된다. 야당이 고통스러운 돌연변이 없이 ‘포스트 이재명’의 얼굴만 바꾸려 한다면 당내 투쟁에서도 패배하고 국민에게도 외면받게 될 것이다. 답은 이재명 저 너머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