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지금 미국의 파격 행보와 변칙 전술 앞에서 숨죽이며 주변국을 곁눈질만 하고 있다. 동맹국들도 저마다 주판알을 튕기며 혹시나 성난 공룡을 자극할까 말을 아낀다. 지난 석 달 트럼프 미 대통령의 언행을 보면 국체를 새로 짜고 국시를 뒤바꾸는 위로부터의 혁명이 진행 중인 듯하다. 미국은 최근 파리 기후변화 협정과 세계보건기구에서 탈퇴했다. 러시아는 동맹처럼 감싸면서 우크라이나에는 무기 지원을 중단하기도 했다. 국경을 맞댄 멕시코와 캐나다에 25% 관세 인상을 선언했고, 캐나다, 그린란드, 파나마를 향한 팽창 야욕을 숨기지 않는다. 베네수엘라 갱단을 추방할 땐 1798년 전시(戰時) 법안까지 꺼내 들었다.
트럼프의 언행은 국제정치의 독립변수가 되었다. “미치광이”라 비난해 봐야 미치광이 전술을 구사하는 인물에겐 하책(下策)일 뿐이다. 국제적 반미 연대 구축도 허망한 발상이다. 며칠 전 새로 뽑힌 캐나다 총리는 영국·프랑스와 정상회담을 펼쳤지만, 미국에 항의하는 공동성명서 따윈 고려도 할 수 없었다. 세계 그 어떤 나라도 미국이 맡아온 세계사적 중대 임무를 대신 떠맡을 수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1939년 33만명에 불과했던 미군 병력은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 대폭 늘어나서 1945년 1220만명까지 급증했다. 그 대규모 병력으로 독일과 일본의 항복을 접수한 미국은 2차 대전 이래 140여 국가에 군사 시설을 유치하고 규칙 기반의 자유주의 국제 질서를 관장해 명실상부 세계 최강의 군사·경제 대국으로 군림해 왔다. 냉전기 자유 진영의 리더로서 미국은 자유, 인권, 민주, 법치, 시장경제, 자유무역 등 범인류적 보편 가치를 선양하며, 마오주의의 낡은 틀에 갇힌 중국을 개혁·개방으로 이끌고, “악의 제국” 구소련을 결국 무너뜨렸다. 미국 중심의 자유주의 국제 질서가 유지됐기에 패전국 독일·일본조차 번영을 누릴 수 있었고, 한국·대만 등의 경제적 기적도 가능했다. 호기롭게 백악관을 찾아온 우크라이나 수장을 앞에 두고 미국 정·부통령이 돌아가며 고마워하라 요구한 것은 결국 전 세계를 향한 메시지였다.
지난 70여 년 미국은 세계 질서를 유지했음에도 동맹국들에서 외려 미국을 “악의 제국”이라 비난하는 싸구려 음모론이 범람했다. 특히 1975년 사이공 함락 이후 미국에서 만들어진 수정주의 음모론이 국제 반미 연대를 부추기는 아이러니를 지켜보면서 평범한 미국인들은 분노했다. 그들은 미국이 전 세계 방위비의 40%를 지출하며 자유주의 국제 질서를 지켜왔는데 동맹국은 미국을 얕잡아 보고, 적대국은 은밀하게 미국 사회를 내부에서 파괴하고 있다고 믿는다. 트럼프는 바로 그런 미국인들을 향해서 미국을 조롱하는 나라들이 미국을 존경하게 만들겠다고 입버릇처럼 외쳐왔다. 진정 미국이 중국이나 러시아처럼 군사 위협과 영토 확장도 서슴지 않는다면 자유주의 국제 질서는 순식간에 붕괴하고 만다.
1953년 5월 30일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을 독촉하는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을 향해 한국을 버리면 “미국은 공산주의의 사막에 고립된 민주의 오아시스로 남을 것”이라 경고한 후, 보름쯤 지나 단독으로 반공 포로 2만7000명을 석방하는 비상조치를 발동했다. 격노한 아이젠하워는 철군을 운운했지만, 결국 이승만의 인도적 조치를 묵과했다. 냉전 초기 미국 지도자들은 그렇게 신의 가호를 입은 미국이 예외적 국가라는 신념 위에서 공산 전체주의에 맞서는 도덕 외교를 펼쳤다. 반면 오늘날 미국은 내셔널리즘의 기치 아래 “미국 먼저”를 외치고 있다. 낯설 대로 낯설어진 미국에 대해 한국은 어떤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는가? 만약 8년 전처럼 탄핵이 인용되어 조기 대선이 치러지면 정권 교체 가능성이 크기에 그런 걱정이 앞선다.
70여 년 전 미국은 거의 3만4000명의 사망자, 10만3000명의 부상자, 8000명의 실종자를 내며 대한민국을 지켰건만, 한국 지식계에선 반미주의가 역병처럼 퍼졌다. 얼마 전 거대 야당이 대통령 탄핵 사유로 “북·중·러 적대시”와 “일본 중심 외교”를 꼽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국 정치판에서 반미·친중·종북은 머리 붙은 세 쌍둥이란 사실은 미국 정부가 가장 잘 알고 있다. 한반도에서 흘린 피가 아깝다고 느끼는 순간 미국은 바로 헤어질 준비가 되어 있다. 어떤 국가든 외교전에서 승리하려면 자국 내 사상전에서 먼저 이겨야 한다. 하물며 북·중·러의 코앞에 놓인 대한민국임에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