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한양대 석학교수)은 한 달 넘게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고 했다. 지난 2월부터 학회 임원은 물론 반도체 기업, 산업통상자원부, 국회 반도체특위 관계자들과 매일 만나 반도체 산업 육성 대책을 논의하고 밤늦게까지 연구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자료를 만들었다. 이 자료들은 지난 13일 정부가 발표한 ‘K반도체 전략’의 골자가 됐다. 2030년까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기업들이 510조원 이상을 투자하고, 정부는 파격적인 세제 혜택과 인프라를 지원하는 방안이다. 규모로만 따지면 ‘단군 이래 최대 산업 정책’이다.

산업/ 14일 오후 서울 성동구 한양대학교에서 박재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 학회장이 본지와의 인터뷰를 갖고 있다. 2021. 5. 14 / 장련성 기자

연구할 시간도 부족하고, 누가 수당을 챙겨주는 것도 아닌데 그는 왜 밤을 새워가면서 반도체 육성 정책 마련에 앞장선 것일까. 14일 한양대 첨단반도체소재·소자개발연구소에서 만난 박 교수는 “한국 반도체에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고 했다. 그는 “미국과 중국이 엄청난 돈을 쏟아부으면서 반도체 패권 경쟁을 펼치고 있는데, 한국도 참전하지 않으면 미래 산업에서 도태된다”면서 “정부만 믿고 기다릴 수 없어서 나선 것”이라고 했다. 이날도 박 교수는 연구실에서 각종 법안을 뒤지며 첨삭하고 있었다. 수도권 총량제, 한국전력공사법 등 수십 가지 법안에 붉고 푸른 표시가 빼곡했다.

법 개정 늦어지면 도태된다

- 반도체 연구소에서 왜 법안을 보고 있나.

“어제 발표한 K반도체 전략 때문이다. 대부분 법이 개정되지 않으면 시행이 불가능한 내용이다. 정부가 알아서 관련법을 고쳐달라고 하면 뭘 바꿔야 하는지 잘 찾지도 못한다. 개정이 필요한 법들을 학회가 다 정리해서 정부에 가져다 주려고 한다. 세제 혜택, 전력·용수 지원, 인력 양성 등등 모두 제각기 다른 법안 개정이 필요하다. 정부 여당이 8월 말에 반도체 특별법을 제정한다는데, 그때 일괄 개정이 돼야만 한다. 무엇보다 시간이 중요하다.”

- 반도체 산업에서 특별히 시간이 중요한 이유가 있나.

“반도체는 기술이 앞서고, 점유율이 높은 1등 업체가 절반 이상의 이익을 독식한다. 삼성전자 메모리 산업을 보면 알 수 있다. 법 개정이 늦어져서 인프라 지원이 6개월 늦어지면 경쟁력은 6개월 늦어지는 게 아니다. 아예 못 따라가게 된다. 무조건 8월에 법이 개정되고 지원이 시작돼야 한다.”

- K반도체 전략은 어떻게 평가하나.

“학회와 반도체산업협회가 요구한 내용이 상당수 수용됐다. 반도체 업계에 30년 넘게 있었는데, 정부가 이러는 건 처음 봤다. 반도체 원로들 사이에서는 ‘코로나 아니고, 정부의 인기가 좋았으면 이런 대책이 나왔겠나’ 하는 농담까지 나온다. 전략의 방향성은 옳다. 하지만 내용은 아직 미진하다. 반도체는 특정 산업을 키우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경쟁력 이슈다. 상대가 미국·중국·대만이면 정부 지원도 그 국가들만큼 돼야 한다.”

지난 13일 삼성전자 평택캠퍼스에서 열린 ‘K반도체 전략보고대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연설하고 있다. 2030년까지 민간 기업이 510조원을 투자하고 정부가 인프라와 세제 지원을 대폭 강화한다는 게 이번 전략의 핵심이다. /뉴시스

미국·중국만큼 지원해야 경쟁 가능

- 파격적인 세제 혜택이라고 하던데, 부족한가.

“R&D(연구·개발)는 40~50%, 시설 투자는 6~16% 세제 혜택을 준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중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반도체 세제 혜택을 계산해보니 미국은 연간 17조원, 한국은 최대치로 계산해도 8조원이 안 된다. 이건 나라 규모 문제가 아니다. 어차피 반도체는 투자할 수 있는 기업이 정해져 있다. 다른 나라 반만 지원하고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고 하면 경쟁이 안 된다. 중국의 인프라, 연구·개발 자금 지원은 묻지 마 수준이다. 반도체 업체는 법인세를 면제해주고, 일하는 직원들의 소득세까지 깎아준다.”

- 정부가 풀겠다는 규제가 수십 가지다. 진짜 규제 때문에 애로가 많았나.

“뜯어보면 다 막아놓은 수준이다. 반도체는 물이 많이 필요한데 평택이나 용인에서 쓸 물을 안성까지 가서 끌어와야 한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용수를 확보하느라 1년 넘게 지연됐다. 전력 설비는 한전이 지어야 하는데, 한전은 계획에 없는 건 안 한다. 그러다 보니 삼성전자는 평택캠퍼스 송전 시설 지하화에 750억원을 냈고, SK하이닉스는 용인 송전망 구축에 5000억원을 낸다. 당장 공장을 지어야 하는데, 한전 계획대로 기다리면 10년씩 걸리니까 기업이 생돈을 쓴다. 대만 TSMC가 애리조나에 반도체 라인을 짓는데, 미국은 피닉스시가 도로·용수 공급에 2230억원을 지원해준다.”

박 교수는 노동과 안전 관련 규제도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중대재해처벌법에 대해서는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이른바 소부장 기업들이 공포를 느끼고 있다”고 했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사망자가 나오면 경영자는 최소 징역형, 법인에 50억원의 벌금을 내도록 하고 있다. 박 교수는 “1년 수익이 1억~2억원 나는 (중소) 업체들이 대부분인데 사고가 나면 경영자는 감옥에 가고, 회사는 문을 닫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 화학물질등록평가법, 근로기준법 개선도 반도체 업계의 요구 사항에 포함됐다.

“화학물질 테스트하는 데 한국은 100㎏만 넘으면 수백만원씩 내고 인증을 받아야 한다. 반도체 산업에서 100kg이면 샘플을 만들어보는 수준이다. 돈도 돈이지만 인증에 최대 3개월씩 기다려야 한다. 일본은 기준이 1t, 미국은 10t이다.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52시간 근로기준법도 반도체 산업은 풀어야 한다. D램 하나 만드는 데 150일 걸린다. 낸드플래시는 300일이다. 항상 긴장하고 대처해야 정상적인 생산이 가능한데 52시간 근로를 준수하면서는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세제 혜택도 좋고, 인프라 지원도 좋은데 개발·생산이 어려우면 아무 쓸모 없는 일이다.”

메모리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

- 최근 한국의 메모리 반도체 경쟁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얘기가 나온다.

“메모리는 20년간 한국이 최고였다. D램은 회로 선폭을 줄이는 ‘스케일 다운(Scale-down)’ 기술이 핵심이다. 과거에는 1년에 몇 나노(1나노미터=10억분의 1미터)씩 줄였는데 이제 1년에 1나노도 줄이기 힘들다. 불과 1~2년 전만 해도 삼성전자가 먼저 신기술을 발표하고, SK하이닉스·마이크론이 순서대로 내놓았는데 이젠 몇몇 제품은 역전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줄이는 속도가 한계에 부딪히다 보니 생긴 일이다. 낸드플래시는 문제가 더 심각하다. 낸드플래시는 얼마나 높이 쌓을 수 있느냐가 관건인데 현재 200단 가까이 왔다. 그런데 삼성전자는 생산 비용을 줄이겠다며 200단의 데이터 통로를 한 번에 연결하는 ‘원스택(one-stack)’을 시도했다. 반면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은 두 번에 나눠서 쉽게 가는 방법을 택했다. 결국 삼성이 원스택 기술 개발에 실패하고, 더블 스택으로 돌아갔는데 이 과정에서 시간과 비용을 허비한 것은 물론 기술 격차마저 줄었다. 좋게 말하면 도전해서 실패한 거고, 나쁘게 말하면 자체 기술력에 대해 자만한 거다.”

박 교수는 최근 삼성전자가 차세대 성장 동력으로 키우고 있는 파운드리(위탁 생산)가 생각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파운드리는 기술력과 생산 능력이 절대적인데 삼성전자는 둘 다 TSMC보다 6개월가량 뒤처져 있다”고 했다. 퀄컴·애플·인텔 같은 대형 고객사들은 6개월마다 새로운 제품을 출시하는데, 6개월씩 뒤처진 삼성전자에 주문을 줄 리가 없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선두 주자인 TSMC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엄청난 기술 투자를 할 수밖에 없다”면서 “리스크가 크지만 도전하지 않으면 차이는 더 벌어진다”고 했다. 파운드리를 키워야 메모리 기술 격차가 줄어드는데 따른 수익 하락을 대비할 수 있다고도 했다.

- 차량용 반도체 부족이 심각하다. 한국은 차량용 반도체 점유율이 2%도 안되는데 어떻게 풀어야 하나.

“지금 차량용 반도체 중에 가장 부족한 게 마이크로 컨트롤 유닛(MCU)인데, 개당 1달러짜리의 연간 시장 규모는 62억달러(약 7조원)다. 전기차·자율주행차는 MCU가 지금보다 10배 필요하니까 70조원 시장이 된다. 한국 자동차 업체들을 위해서도 그냥 내버려둘 수 없는 시장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장비는 차량용 반도체를 만들기에는 너무 고사양이다. 정부가 나서면 된다. 산업단지나 공동연구소 같은 것을 만들어 기업을 참여하게 하고 기술 개발부터 생산까지 하면 된다. 1980년대에 정부가 나서서 삼성·현대·금성(현 LG)과 함께 4M(메가) D램을 개발했다. 그게 오늘의 한국 반도체를 만들었다. 그 경험을 다시 살리면 된다.”

- 산업계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면 얘기가 계속 나온다. 반도체 전문가 입장에서 사면이 필요하다고 보나.

“삼성전자는 반도체, 스마트폰, 생활가전·TV 이렇게 3개 사업부가 있고 각각 대표이사가 따로 있다. 작년에 삼성이 반도체에서 73조원 매출에 19조원 이익을 냈다. 그런데 삼성이 1년에 반도체에 얼마 투자하나. 최소 30조원에서 40조원이다. 반도체에서 번 것 말고 다른 돈까지 반도체에 쏟아붓겠다고 반도체를 총괄하는 김기남 부회장이 결정할 수 있나. 기업 인수·합병(M&A)도 마찬가지이다. 가장 빠르게 성과를 낼 수 있고 경쟁력을 유지하는 방법이 M&A다. 그런데 반도체에서 번 돈을 다 투자하고 나면 무슨 돈으로 M&A를 하나. 그런 결정을 하는 건 오너가 아니면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