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봄, 외국서는 백신 맞고 돌아다니는데 우리 국민은 1년 반째 가택 연금 상태에 있었다. “이명박이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백신을 구해 왔을 것”이라는 말이 나왔다. 저평가된 대통령으로 MB를 꼽는 사람이 적잖다. 그래도 ‘MB가 옳았다’ 같은 책은 나오지 않는다. 빠, 팬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죽은 대통령, 수감된 대통령도 구해내는 게 ‘팬덤’이다.

90년대 H.O.T. 팬클럽의 상징색은 흰색이었다. 흰색 우비를 입은 H.O.T 팬클럽 클럽 H.O.T. '하얀 천사'라고도 불렸다.

1996년 데뷔한 H.O.T가 세상이 주목하는 아이돌이 된 데는 팬클럽의 공이 컸다. 개인 취향, 좋아하는 마음 같은 추상적 재료를 체계적인 조직으로 만들고, ‘하얀 풍선’ 같은 상징을 띄웠다. ‘빠순이’라는 경멸적 호칭도 이들로 인해 널리 퍼졌다. 빠순이는 ‘오빠 따라다니는 여자애들’을 말한다. ‘빠순이’ 석 자에는 대중문화, 여성, 청소년을 낮게 보는 시선이 촘촘히 박혀 있다.

지역주의를 깨는 정치인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여 2000년 ‘노사모’를 결성했다. 감독 이창동, 배우 문성근·명계남 등이 조직을 키웠다. 대중문화 코드가 차용됐다. 대중가수급 인기를 누렸던 운동권 노래 모임 ‘노찾사(노래를 찾는 사람들)’를 닮은 작명부터 노란색이라는 상징, 돼지 저금통으로 ‘푼돈 모으기’까지….시간이 지나 결국 ‘노무현 팬덤’이 강화됐다.

가장 주목할 점은 정치인을 ‘지지’가 아닌 ‘사랑’의 대상으로 포지셔닝했다는 점이다. 정치인 노무현은 ‘계파 정치’를 혐오했다는데, 결국 ‘팬덤 정치’는 이합집산하며 모순을 자체 해결하는 계파 정치 최소한의 미덕마저 갈아엎었다.

문재인 대통령 집권 초기, 팬들의 응원 구호는 ‘우리 이니 하고 싶은 거 다해’였다. 팬들은 ‘우리 이니’의 적에게 양념질(악성 댓글)을 해댔고, 조국씨의 자동차를 물티슈로 닦았다. ‘문빠’라 불리지만, 실제 ‘문재인 팬덤’은 자식에 맹목인 ‘극성맘(엄마)’의 이미지다.

요즘 가장 주목할 현상으로 20대 여성의 투표 성향을 꼽는다. 대선에서 이재명 후보에게, 6·1 지방선거에서는 민주당에 몰표를 줬다. 주요 세력 일부는 스스로 ‘개딸’을 자처한다. 이재명 의원을 ‘잼파파’라 칭하고, ‘아버지 각하’라 부르는 이들도 있다. 딸바보 아버지-성깔 있는 딸의 구도로, 요즘의 가정을 닮았다.

가부장제를 혐오하는 페미니즘, 그걸 가장 지지하는 20대, 그들이 ‘개딸’의 주역이라는 기이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가짜(pseudo) 아버지’를 비판하면 문자 폭탄으로 협박하고, 아버지가 ‘살살 하라’고 메시지를 내면 금세 태세를 바꾼다. ‘우리 이니’를 외쳤던 30, 40 여성 일부도 ‘이니’보다 열 살 어린 이 의원에게 ‘잼파파 사랑해요’ 한다.

공부는 얇은데 행동력은 강한, 납작한 페미니스트의 주장이 커뮤니티와 온라인을 접수한 지 오래다. 무지는 무지를 인지하지 못하므로, 선배들이, 학자들이 나섰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쓴소리는커녕 ‘여성은 피해자’라는 도식에서 벗어나자고도 못했다. ‘조리 돌림’ 장인(匠人) 20대에게 찍히면 강의도, 책도 끝장이기 때문이다.

지난 6일 오전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중앙당사 들머리에 이재명 의원 지지자들이 보내온 화환들이 놓여있다. / 뉴스1

정부 여당은 이들 세대는 진즉 포기하고, 5060 기득권 여성을 무더기로 장차관에 임명하며 ‘할당량 채웠다’고 하고 있다. 야당은 ‘20대 개딸’을 이용해 어떻게 새 판을 짤 건가만 고민 중이다. 누구도 20대를 ‘주역’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우쭈쭈 페미니즘’은 결국 무서운 유권자, 정치 예비군을 ‘권력 가부장제’의 자원봉사자로 만들어 버렸다. 이들은 ‘가짜 가부장제’의 우산 아래서 한국 정치의 ‘탈레반’이 되어가고 있다. 지난 한 세기 여성들은 투쟁해왔다. 누구의 딸, 집사람, 어머니가 아닌 그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