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엄 이후 펼쳐진 탄핵 정국은 공수처·법원·선관위 같은 국가 기관이 좌파 카르텔에 포획된 것 아니냐는 의문을 폭발시켰다. 그중에서도 헌법재판소가 심각했다. 헌재 재판관 8명 중 3명이 이념적으로 치우쳤다고 지적받는 ‘우리법 연구회’ 출신이었다. 전체 판사의 5%도 안 되는 특정 집단이 헌재의 40%를 차지했으니 정상이 아니었다. 편향성 논란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떤 헌재 재판관은 2년 전 인사 청문회의 한 장면이 소환됐다. 대한민국의 주적(主敵)을 묻는 질문에 답변을 거부하더니 마지못한듯 “(정부·군이) 북한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답한 것이었다. 헌재는 자유 민주주의 헌법 질서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다. ‘북한이 주적’이란 말조차 하지 못하는 판사가 국가 정체성을 수호하는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충격 받았다.
헌재를 좌편향 인사들로 채워 넣은 것은 문재인 정권과 민주당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민주당은 골수 운동권 출신 마은혁 판사를 새 재판관 후보로 밀어붙이고 있다. 마 후보를 임명하지 않는 최상목 대통령 대행에게 “몸조심하라”고 조폭 식으로 협박하더니 탄핵 카드까지 꺼내 들었다.
최 대행은 여야 합의가 없다는 이유로 마 후보 임명을 늦추고 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다. 젊은 시절 마 후보는 체제 전복을 꿈꾸던 마르크스·레닌주의자였다. 민주당은 하필이면 그런 사람을 후보로 낙점했고, 우리는 그의 이념적 정체성에 확신을 갖지 못한다. 이것이 ‘마은혁 문제’의 핵심이다.
마은혁은 서울대 정치학과에 81학번으로 입학했다. 전두환 정권 시절, 그는 숨어서 활동하는 ‘언더 그룹’에서 활약했다. 운동권 동료들은 그를 진정성 있고 치열했던 사람으로 기억했다. 의식화 학습 조직을 잘 이끌었고 신망도 두터웠다고 한다. 3학년 때 체포될 것을 전제로 시위에 앞장서는 ‘데모 팀’에 지명됐지만 학원 자율화 조치가 시행되면서 감옥행(行)을 피했다. 그는 군 제대 후 ‘인민노련(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에 참여하면서 노동 운동권의 전면에 서게 된다.
1987년 결성된 인민노련은 계급 혁명을 추구하는 반체제 조직이었다. 노회찬·주대환 등이 지도부를 구성하고, 조승수·송영길·신지호 같은 학생 운동가들이 가담해 출범했다. 반제(反帝)·반파쇼·반재벌 등의 강령을 내세웠지만 기본 이념은 마르크스·레닌주의였다. 노동자 주도의 민중 봉기를 일으켜 정권을 타도하고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4년 뒤 인민노련은 대법원에 의해 ‘이적(利敵) 단체’로 판정받는다.
마은혁은 인민노련 출범 때부터 핵심으로 활약했다. 주로 교육·선전을 담당했다고 한다. 함께 활동했던 신지호 전 의원은 그가 “골수였다”고 증언했다. 종북 주사파는 아니었다. 초기 인민노련엔 친북 NL(민족해방)계가 섞여 있었지만 노선 투쟁에서 밀리면서 그를 포함한 지도부는 PD(민중민주)계가 장악했다. 이후 공안 당국의 대대적 검거로 조직이 와해되자 마은혁은 진보 정당을 거쳐 34세 나이로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제도권에 들어온 것이다.
28년간 판사의 길을 걸으며 마 후보가 특별히 문제된 일은 없다. 유일한 논란거리가 2009년 국회 로텐더홀을 점거해 기소된 민노당 당직자들을 풀어준 판결이었다. 이념적 편린을 드러낸 이 판결은 결국 상급심에서 뒤집혔다. 그는 전향한 다른 운동권처럼 생각이 바뀌었다는 입장을 밝힌 적이 없다. 공산 혁명을 신봉했던 과거에 대해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도리도 없다.
그를 아는 사람들의 평가는 엇갈린다. 인민노련을 주도했다가 전향한 주대환 민주화운동동지회장은 ”마은혁이 공산혁명 사상을 접었다”고 했다. 인민노련이 나중에 내부 토론을 거쳐 사회 민주주의의 합법 투쟁으로 방향을 틀었는데, 마은혁이 노선 전환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 근거였다.
반면 1980년대 노동 운동의 대부 김문수 고용부 장관은 “매우 위험하다”고 했다. 자신이 아는 마은혁은 “결정적 시기에 폭동을 일으켜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하려 한 마르크스·레닌주의자”라며 “사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했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본인만이 알 것이다.
사상의 자유는 존중돼야 한다. 어떤 사람을 향해 내심을 밝히라고 강요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것이 국가 정체성을 지키는 헌법 기관의 문제라면 얘기가 다르다. 헌재 구성의 다양성은 필요하지만 극단적 사상까지 포용하라는 것은 헌법의 허용 범위를 넘는 일이다.
마 후보자가 스스로 밝혀 국민에게 확신을 주기 바란다. 김문수 장관이 ‘공산주의자’라고 공개 저격했는데도 그는 지금껏 어떤 항변도, 해명도 없다. 침묵하는 그를 기어이 헌재에 보내겠다는 민주당의 정체성도 궁금해진다. 마 후보자에게 듣고 싶은 것은 “생각이 달라졌다”는 한마디뿐이다. 그 말 하기가 그렇게도 어려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