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그룹의 방산(防産) 계열사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유상증자(이하 유증)와 관련한 논란이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한화에어로가 국내 기업 사상 최대 규모인 3조6000억원의 유증을 추진했다가 주주들의 반발이 이어지자 증자 규모를 2조3000억원으로 줄이고, 많은 비판을 받았던 계열사 간 ‘수상한(?) 거래’도 되돌리며 물러섰는데도 정치권에서는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태세다.
14일 국회에서는 ‘한화 경영권 3세 승계, 이대로 괜찮은가’라는 이름의 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토론회에는 대기업 지배 구조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 제기를 해온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와 학계 인사 외에도 범야권 의원 20여 명이 참석해 국감장을 방불케 했다. 국회에서 한 기업을 콕 찍어서 토론회를 여는 것도, 야권 의원 20여 명이 공동 주최자로 참석한 것도 이례적인 일이다.
이날 참석자들은 “한화 유증은 편법적인 경영 승계를 위해 소액 주주를 희생시킨 것”이라며 “이를 견제할 수 있는 종합적인 규제 기관을 설립해야 한다”고 강경 발언을 쏟아냈다. 한 참석자는 “기업의 잘못된 행동을 바꿀 수 있는 곳은 시장이 아니라 권력”이라고 했고, 또 다른 참석자는 “한화 이사회는 소액 주주를 보호하기 위한 어떤 역할도 못 했다”고 직격했다. 야권의 공세가 거세지자 한화의 유증에 대해 애초 ‘과감한 투자 결정’이라고 칭찬했던 이복현 금감원장도 태도를 바꿨다. 금감원은 최근 한화의 유증에 대해 2차 정정 요구를 하며 신고서를 반려했다.
올해 국내 증시 최고 성장주로 꼽히는 한화에어로의 유증은 기업인들이 반대하는 상법 개정을 앞두고 전격 추진한 점, 그리고 유증 발표 직전에 있었던 계열사 간 지분 거래로 인해 발표하자마자 엄청난 논란을 빚었다. 한화에어로는 유증 발표 한 달여 전 1조3000억원 규모의 한화오션(옛 대우조선해양) 주식을 매입했는데, 하필이면 주식을 판 한화에너지는 김동관 부회장 3형제가 지분 100%를 보유한 비상장 회사였다. 이로 인해 한화에어로가 회삿돈으로 최근 1년 새 2배 이상 오른 한화오션 지분을 사들여 총수 일가의 개인 회사에 현금을 몰아주고, 부족한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일반 투자자 상대로 대규모 유증을 단행하는 것이라는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주식을 발행해 돈을 끌어 모으는 유상증자는 전체 주식 수가 늘어나는 만큼 주가는 반대로 하락한다. 그래서 주식의 가치가 희석되는 유상증자를 물타기 증자라고도 한다.
정치권에서는 한화 유증 논란을 주주에 대한 이사의 의무를 명시하는 상법 개정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대표적인 케이스로 활용할 태세다. 실제로 일부 국민의힘 의원들도 찬성으로 선회하려는 조짐을 보이고 심지어 재계 내부에서도 야권 주도의 상법 개정안을 마냥 반대하기는 힘든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오고 있다. 한 재계 관계자는 “기업들이 소액주주를 보호하는 자율 규제안을 만들어 선제적 대응에 나서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고 했다.
최근 수년 사이 재계 3·4세들이 경영 전면에 나섰다. 그들은 해외 명문대를 졸업하고 글로벌과 미국식 합리주의에 최우선 가치를 두는 경향이 있다. 장인 정신으로 한 우물을 팠던 선대(先代)와 달리, 월가의 은행가처럼 기업을 사고팔고 뗐다 붙였다 하면서 재무적 가치를 끌어올리는 것에도 능수능란하다. 하지만 다이아몬드 수저인 이들에게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많다. 직원들과의 유대나 충성심보다는 기능적 역할을 더 중시하는 데다 회사에 들어오자마자 인(人)의 장막에 둘러싸여 일반 직원들이나 외부로부터 날것 그대로의 목소리를 들을 기회가 거의 없다. 그런 탓에 이번 한화 유증처럼 일반의 정서와는 동떨어진 결정으로 그룹 전체를 위기에 빠뜨릴 우려가 있다.
이병철 삼성 창업 회장은 아들 이건희 회장에게 삼성그룹을 물려주면서 ‘경청(傾聽)’과 ‘목계(木鷄)’를 강조했다고 한다. 쓴소리를 귀담아듣고 나무로 만든 닭처럼 교만과 조급함을 버리고 삼성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들라는 뜻이었다. 지금 재계 3·4세들이 새겨야 할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