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 대선이 다가오니 ‘행정 수도’ 세종을 향한 구애가 넘쳐 난다. “임기 내 국회 세종의사당과 대통령 세종 집무실 건립” “국회 세종 완전 이전” “노무현의 꿈 ‘행정 수도’ 이제는 완성해야” “노무현의 꿈, 박근혜의 소신, 개혁신당이 완성”이라고 여야 정치인들이 앞다투어 ‘세종 시대’를 외치는 걸 보면서 20년 전 튀르키예를 취재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노무현 정부에서 수도 이전 문제가 화두로 떠올라 2004년 본지는 ‘수도 이전, 외국서 배운다’라는 기획 시리즈를 연재했다. 당시 튀르키예 취재를 맡았다. 오스만 제국의 수백 년 수도였던 이스탄불 대신, 건국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은 1923년 수도를 앙카라로 정했다. 제국과 단절하는 공화국의 상징이 필요했고, 영토가 축소돼 국토 서쪽 끝이 된 이스탄불을 계속 수도로 사용하기도 적절치 않았다. 동서 길이가 1600㎞에 달하는 장방형 국토에서 앙카라는 내륙으로 450㎞ 들어간 곳에 있다. 인터뷰한 튀르키예 교수가 “한국은 새로 옮길 수도가 얼마나 떨어져 있냐”고 묻길래 “120㎞쯤 된다” 했더니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리 가까운데 굳이 뭐 하러 옮기나.” 핵심을 찌르는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그 학자는 이런 조언도 해줬다. “행정 수도라 해도 행정 기능만 있으면 안 된다. 한 도시가 제대로 성장하려면 독자적 경제 기반을 갖춰야 한다.”

우리나라 행정 수도 이전 구상은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도 있었다. 가장 큰 이유가 안보 때문이었다는 것이 손정목 도시 계획 전문가(저서 ‘서울도시계획 이야기’)의 설명이다. 1975년 초까지 박 전 대통령은 “북한이 남침하면 그 많은 인구가 도강(渡江) 피란할 수 없다”며 강북 억제책과 강남 이주책을 폈다. 그러다 인도차이나반도가 공산화되고, 북한이 개발한 장거리포 사정거리가 200㎞를 넘는 걸 보면서 강북 억제가 아닌 서울 및 수도권 인구 재배치를 고민했다. 1977년 2월 ‘임시 행정 수도’ 구상을 발표하고 책임자를 오원철 중화학공업기획단장으로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다만 수도는 서울로 유지하면서 임시 행정 수도 계획안은 장기 과제로 제시했다. 박 대통령이 서거하고, 1990년대 북한이 일본까지 사정권으로 하는 노동 미사일을 개발하면서 안보 목적의 행정 수도 이전은 더 이상 논할 의미도 없어졌다.

그렇게 사라진 구상인데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민주당 후보가 ‘국토 균형 발전’ 명분으로 파격 공약을 던졌다. 노 전 대통령의 신행정수도법은 2004년 10월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으로 무산됐지만, 충청권에 어필하는 정치 상품으로 등장한 이상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기업인’ 출신 이명박 전 대통령은 반대했는데 ‘정치인’ 박근혜 전 대통령은 세종시 원안을 관철시켰다. 이후 선거 판에서 행정 수도 세종, 공기업의 지방 분산 같은 노무현식 ‘균형 발전론’은 정치인들이 애용하는 단골 프레임으로 등장해 왔다. 문제는 명분은 그럴듯한데 투입 대비 부가가치 창출 효과는 별로 없는 ‘세금 나눠 먹기 발전’이라는 데 있다.

인구 절반이 수도권에 몰린 초집중 현상은 한국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처방으로 ‘행정 수도 이전’은 갈비뼈 골절에 어마어마하게 값비싼 반창고 붙인 격에 불과하다. 행정 수도란 쉽게 말하면 세금으로 월급 받는 공무원에게, 엄청난 세금 들여 새 사무실 지어주고 이사시키는 것이다. 그 많은 세금을 그리 쓰지 말고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마중물로 썼어야 한다. 가령 서울에 집결한 기업, 대학들 연구소에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제공해 남하시키고 대전의 KAIST, 대덕 연구 단지와 연계되는 민-관-학의 세계적 ‘두뇌 도시’를 만들고자 했다면 어땠을까. 현재의 수도권 집중은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 이후로는, 수도권 이남에 제2, 제3의 강력한 신산업 경제권과 그것의 중추 대도시를 키워내지 못해 생긴 현상이다. 정치인은 ‘균형 발전’ 명분으로 곳곳에 골고루 세금 뿌려 표 얻는 데 집중하지, 차별화된 전략의 ‘불균형 성장’이 필요하다는 현실론은 절대 말하지 않는다.

세종시에 그 많은 세금을 들였는데 정부 기능이 이원화되면서 공무원 윗분들은 서울 국회를 오가는 데 시간 쏟고, 세종에 남은 공무원들의 정책 수립 경쟁력은 뒷걸음질 쳤다. 국토 균형 발전 목표는 조금 달성했을까. 2012년 특별자치시 출범 당시 인구 11만명에서 2024년 39만여 명으로 증가했는데 순유입 인구의 24%만 수도권에서 갔다. 64%가 대전을 비롯해 충청권 인구를 흡수한 ‘빨대 효과’다. 세종시의 성장 호재는 아직 서울에 남은 국회, 대통령 집무실 등이 더 내려가는 것뿐이다. 그래서 선거철마다 정치인들의 말잔치에 집값이 출렁거리는 정치 테마 도시가 됐다. 정치가 벌여놓은 ‘말로만 균형 발전’의 불편한 진실이다.

이런 어정쩡한 상태로 있느니 우리 사회에서 가장 후진적인 정치판 국회를 몽땅 세종으로 옮겨 공무원의 이동 거리를 줄여주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이왕이면 ‘정치는 4류, 관료는 3류’ 딱지를 떼고 국격에 걸맞게 수준 높아질 때까지 세종시 밖으로 외출을 금한다는 조건까지 붙이면 좋겠다는 공상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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