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미국 텍사스주 유밸디 초등학교에서 총기 난사로 학생과 교사 21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이튿날 주정부와 경찰이 유족과 취재진을 큰 강당에 모아놓고 첫 수사 브리핑을 열었다. 회견은 TV로 생중계됐다.
공화당 소속 그레고리 애벗 텍사스 주지사가 “경찰은 18세 용의자가 학교에 무단 침입하리라고 예측하지 못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갑자기 “다 당신 탓이야!”라며 누군가 연단 앞으로 난입했다. 11월 중간선거에 민주당 주지사 후보로 나선 베토 오로크였다. 흥분한 오로크는 “당신이 아무런 조치(총기 규제)를 하지 않았잖아. 당연히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예측했어야지!” 하며 삿대질했다. 인상적 장면은 그다음이었다. 주 관료들이 “유족과 언론을 위한 자리예요. 당신이 나설 데가 아닙니다.” “이런 일을 정치에 이용하지 마세요!” 하며 그를 저지했다. 오로크는 끌려 나갔다가 진정한 뒤 돌아왔다. 유족 중 한둘이 “그에게 발언권을 주라”고 했으나 대부분 조용히 브리핑이 재개되길 기다렸다.
이 장면을 현지 매체들이 어떻게 보도하는지 눈여겨봤다. 오로크가 정적인 현직 주지사를 욕보이려 유족 앞에서 ‘분풀이 쇼’를 했다는 비판부터 ‘잇따른 총기 참사에도 공화당의 반대로 총기 규제가 번번이 실패한 만큼 그의 분노는 일리가 있다’는 평도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참사 현장에서 펄펄 뛴 정치인을 칭찬하지는 않았다. 한국 기자 눈에 익숙한 그의 행동은 미국에선 매우 이례적이었다.
요즘 미국 정치도 극단적으로 분열되고 있지만, 고귀한 생명을 앗아가는 대형 참사나 범죄, 자연재해가 일어나면 공동체의 분열을 가장 경계한다. 누구 잘못이나 책임을 입증할 수 없는 초기엔 더욱 그렇다. 지역사회와 당국은 부상자들과 유족들이 2차 피해를 보지 않도록 보호하며 사태를 수습하는 데 에너지를 집중한다. 책임을 떠맡은 현 정부에 힘을 실어준다. 이번 중간선거에서 텍사스 주민들은 오루크 대신 애벗 주지사를 다시 뽑았다.
특히 애도는 유족들이 가장 사적(private)이고 존엄한 방식으로 할 수 있도록 돕고, 정부와 언론은 정확한 사태 분석에 착수한다. 지난한 작업이다. 희생자와 유족의 뜻이 우선되고, 사실과 과학으로 입증해야 할 영역에 정치가 끼어들어 그 슬픔을 재단하고 분노를 부추길 수 없다. 정치인들이 특정 재난을 ‘정치적 현금화’할 수 있게 되기까지 통상 수년, 수십 년이 걸린다.
드물게 이 금기를 깬 세력이 있다. 음모론 성지 ‘인포워스’ 창립자 앨릭스 존스가 “2012년 샌디훅 초등학교 총기 난사 피해자들은 총기 규제 입법을 위해 동원된 연극배우”라고 주장했다가 10년 만에 2조원대 배상금을 유족에게 물어주게 됐다. 세월호에 이어 이태원 참사까지 “국가 살인” “정권 퇴진이 추모”라며 불부터 지르는 사람들, 타인의 비극을 함부로 저잣거리로 끌어낸 대가가 어떤지 참고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