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넷플릭스에서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가 한 달째 톱10이다. 한국색(色)이 이렇게나 강한 드라마의 인기 덕분에 일본 지인들은 곧잘 제주도 출신인 기자에게 “제주도 사투리를 하나 배웠다”고 연락하곤 한다. 일본어 제목은 ‘오쓰카레사마(수고하셨습니다)’다.
섬나라 일본인들은 청명한 바당(바다) 뒤에 숨은 숨병(잠수병)은 공감할 테지만 ‘남산 가라면 막 다 남산 가요?’ ‘북한이 올림픽 깽판 낸다고 금강산댐 열어버리면 63빌딩이 다 잠긴대?’는 이해 못 할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 때의 실직과 금 모으기를 모르는 일본인들에게 ‘폭싹 속았수다’는 군부 독재, 남북 분단, 국가 도산과 같은 굴곡진 한국 현대사라기보다는, 시골 마을의 로맨스 드라마에 가까울 법하다.
평범한 일본인들에게 한국 대통령의 탄핵·파면이란 역사의 장면도 ‘폭싹 속았수다’와 비슷한 감각 아닐까. 이웃나라서 벌어진 흥미 있는 사건으로만 말이다. 하지만 트럼프발(發) 관세 전쟁과 중국의 대만 위협이라는 국제 정세에서 한·일 관계는 한국인뿐 아니라 일본인의 삶에도 꽤나 직결되는 문제다.
헌법재판소가 윤석열 대통령 탄핵을 인용한 직후,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지체 없이 “일·한 협력은 안전보장이란 측면뿐 아니라 우리나라(일본)의 독립과 평화, 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지극히 중요하다”고 말한 데는 그런 이유가 있다.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일·한의 긴밀한 연계는 최우선 과제”라는 그의 발언에선 긴장감마저 느껴진다. 요미우리신문은 “윤 전 대통령은 징용공(‘강제징용 피해자’의 일본식 표현) 문제를 풀고 극적으로 일·한 관계를 개선한 인물”이라며 “한국 차기 대통령에 따라 일·한 관계도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폭싹 속았수다’를 ‘수고하셨습니다’라고 번역하는 건, 절반만 맞는다. 제주도에는 경사든 흉사든, 집에 일이 생기면 누가 부르지 않아도 동네 사람들이 와서 일을 도와주는 풍습이 있다. 친척도 아니지만 아침부터 밤까지 일만 돕다가 돌아가는 이웃에게 전하는 인사가 ‘폭싹 속았수다’이다. 원래 ‘폭싹’은 ‘완전히’, ‘속았수다’는 ‘속임을 당했다’는 의미다. ‘내 탓에 이번에 고생했으니, 다음번 이웃에 일이 생길 땐 내가 꼭 고생하겠다’는 제주도의 삶 방식이다. 이웃 주민을 ‘삼촌’이라고 부르는 문화는 논농사도 없는 척박한 환경에서 옆집의 자발적 도움 없이는 생존마저도 쉽지 않기에 생겨난 섬 풍습이다.
‘일·한 관계가 최우선 과제’라는 발언이 진심이라면 이번엔 일본이 속아줄 차례가 아닐까. 2년 전 먼저 ‘폭싹 속아준’ 한국의 윤 전 대통령처럼 말이다.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되든, 좋은 한·일 관계가 안보·경제에 서로 이득이 된다는 진실은 바뀌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