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전쟁 중 대구로 피란한 열세 살 소년 이야기다. 이따금 멀리서 쿵쿵 하는 포성이 들리던 1951년의 깜깜한 밤, 소년은 온 동네를 헤매고 있었다. 집에서 쓰러진 어머니를 동생에게 맡겨둔 채 의사를 찾아나선 것이다. 한참 헤맨 끝에 의원 한 곳을 찾았고, “제발 좀 도와달라”며 닫힌 문을 두드렸다. 중년의 의사가 자초지종을 들은 뒤 왕진 가방을 들고 따라나섰다. 이사 온 지 이틀밖에 안 된 소년은 집도 못 찾고 발만 동동 굴렀다. 의사는 “골목에 뭐가 있었느냐. 대문은 무슨 색이냐” 물으며 함께 집을 찾았다.
어머니를 진찰한 뒤 주사를 놔준 의사 선생님. 곧 괜찮아지실 거란 말에도 아이는 눈물만 흘렸다. “선생님. 조금만 더 계셔주세요.” 소년이 애원하자, 막 일어나려던 의사가 웃으며 다시 앉았다. “몇 살이야? 어디서 왔어?” 그렇게 한참을 더 어머니 곁을 함께했다. 의사는 소년을 다시 의원으로 데려가 약을 챙겨주면서 약값도 받지 않았다. “피란살이도 어려운데 됐다. 가서 어머니만 잘 보살펴”라고 덧붙이면서. 소년은 약 봉투를 들고 집에 오는 내내 울면서 ‘나도 꼭 이런 의사가 돼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74년 전 그 소년이 김동건 아나운서다. 그는 “이후 ‘의사’란 말만 들으면 늘 그분이 떠올랐다”며 “80년 넘게 살면서 그런 훌륭한 의사를 많이 만났고, 그분들을 존경한다”고 했다.
흘러간 옛이야기가 아니다. 지금도 많은 이에게 의사는 그런 존재다. 태어나자마자 한 달 넘게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치료받은 필자의 세 살배기 딸에게도 마찬가지다. 많은 의사는 여전히 “진료실에서 환자의 회복을 지켜보며 가장 큰 보람과 행복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사람은 일생에서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지만, 몸을 맡기고 생명을 구해주는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특별하다. 이들의 관계를 받쳐주는 것은 ‘신뢰’다. ‘라포(rapport)’라고도 하는 그 신뢰 관계가 정서적 유대를 넘어 치료의 결과까지 좌우한다.
그런데 1년 가까이 이어진 의정 갈등으로 그 신뢰가 깨지고 있다. 최근 의사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선 ‘환자들이 본인(의사)을 신뢰한다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그렇다’는 응답이 54.6%로, 2년 전보다 12.8%포인트나 떨어졌다. ‘신뢰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는 응답은 2.4%에서 8.0%로 급증했다. 눈엔 보이지 않는 소중한 사회적 자본이 훼손된 것이다.
일부 의사의 도 넘은 막말과 전공의 블랙리스트, 의사 집단 전체를 향한 비난 댓글은 의사와 환자 간 불신에 불을 지폈다. 하지만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지금도 수술실을 지키는 의사, 그들에게 고맙다며 연신 고개 숙이는 환자들을 본다. 감정은 추스르고 눈앞의 의사와 환자를 봐야 한다. 한번 무너진 신뢰는 다시 회복하기 어렵고, 그 피해는 환자, 의사, 나아가 국민의 몫으로 불어나기 때문이다. 신뢰를 지켜내는 것이 의정 사태 해결만큼 중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