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초반 대기업 부장 A씨는 작년 말 부서장에서 부서원이 됐다. 얼마 전까지 하급자로 부리던 40대 중반 팀장이 A씨의 상관이 됐다. 연봉도 1000만원 넘게 줄었다고 한다. 이 회사의 또 다른 부장은 “성과가 나빴던 분도 아니라 20년 전 같으면 자존심이 상해 사표를 던졌을 일인데, 요즘은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오기도 하는 거지’라는 인식이 자리 잡은 것 같다”고 했다.
재계에서 연공서열 파괴 바람이 불고 있다. 저성장 국면,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기업 특유의 위기감과 정년 연장 움직임에 대비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엿보인다. 한 유통업체 부장은 “20년 전엔 부서원 7명 중 부장이 1명이었는데, 지금은 같은 부서에서 8명 중 부장이 절반”이라며 “옛날 방식이면 막내가 부장 4명을 모셔야 하는데 이래서야 일이 되겠느냐”고 했다.
연공서열 파괴가 대세가 된 것은 최근 본격화한 정년 연장 논의와 맞물려 있다. 작년 들어 여야 의원들이 60세 정년을 65세로 연장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한 ‘고용상 연령 차별 금지 및 고령자 고용 촉진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잇따라 발의하고 나섰다. 이에 정부도 “연공서열식 인사 체계를 개편하라”고 기업들에 당부하고 있다. 연차를 떠나 50대의 급여나 직책이 40대보다 낮을 수도 있는 직무 중심 체계를 마련하지 않고 정년 연장만 밀어붙이면 기업들의 채용만 줄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는 기업들만 닦달하고 관가 혁신엔 뒷짐을 지고 있다. 30대 중반 손해보험사 과장급 팀장과 50대 초반 부장급 팀원이 공존하기도 하는 재계와 달리 관가는 직급과 직책, 월급 모두 올라가기만 하고 내려가는 일이 없다. 사무관(5급), 팀원인 서기관(4급), 과장인 서기관, 부이사관(3급), 국장(2급), 실장(1급) 순서로 숨 막히는 일방통행이다. 연차에 따른 경험을 존중하되 필요하면 젊고 유능한 인물을 관리자로 올릴 여지는 희박하다. 이런 문화를 손질하지 않고 정년만 연장할 경우 세금으로 나가는 공무원 인건비만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공무원들의 유일한 보상인 진급은 가뭄에 콩 나듯 할 수밖에 없다. 직원 2만1300여 명의 인사 적체가 극심한 국세청은 60세 정년조차 버거워 4급 이상 직원들을 58세에 내보내는 관행이 자리 잡은 상태다. 7년 전 한 경제 부처 고위 간부는 특정 기수의 인사 적체가 극심하자 “동기들끼리 상의해서 절반은 민간으로 나가는 게 좋겠다”고 당부했다고 한다.
정부가 주도하는 정년 연장 논의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국가공무원 118만명을 거느린 우리나라 최대 사업장, 정부가 아닐까. 초고령화 시대의 노동 개혁이 순항하려면 정부부터 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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