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이맘때, 민노총 간부가 과거 동남아에서 북한 공작원을 만났다가 걸린 사실을 보도했다. 며칠 뒤 언론중재위에서 연락이 왔다. 민노총이나 국내에서 북한 대리인 역할을 하는 단체가 문제 제기한 줄 알았다.
아니었다. 기사에 민노총 간부와 유사한 수법으로 북한과 몰래 교신한 사례로 언급된 A씨가 불만을 제기한 것이었다. A씨가 외국 이메일 계정으로 북한과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기사에 썼는데, 그걸 보도하면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A씨의 판결문을 보면, 그가 북한과 이메일을 주고받은 건 그 자신도 인정한 사실이다. 그런데 그걸 기사에 쓰지 말라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국가보안법 유죄 확정범이 큰소리치니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싶었다.
언론중재위에 따르면, 그는 북과 불법 내통한 다수의 혐의에선 유죄를 받았지만, 이메일 부분에선 무죄를 받았다. 수사 기관이 영장을 발부받아 그의 소지품에서 이메일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적힌 메모를 확보해 로그인하고 북한과 주고받은 메일을 찾은 것인데, 재판부는 그 절차가 부당하다며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메일 로그인 장소는 국내라고 해도, 로그인해 들어간 인터넷 세상의 서버 저장 장비의 위치는 국외이기 때문에 해당 국가의 협조를 별도로 받아야만 법적 절차가 완결된다는 법 해석이었다.
그런데 그 해당 국가는 이런 일을 수수방관하지 협조해주는 나라가 아니었다. 간첩 피의자의 변호인은 이걸 집요하게 파고들었고, 다른 혐의는 유죄가 됐지만 메일 관련은 무죄가 돼 A씨는 더 짧게 옥살이할 수 있었다.
법리상 해석 차이로 유죄든 무죄든 A씨가 외국 이메일로 북한 공작원과 내통한 사실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 따라서 기사에서는 충분히 쓸 수 있다고 봤는데, 그것조차 간첩이 틀어막으려 하니 답답했다.
법조인인 고교 친구에게 토로했더니 친구는 동조해주진 않고 이런 말을 남겼다. “어쩔 수 없다. 그게 법치국가다. 그게 오히려 우리 체제의 우월성을 지탱해주는 기둥이다.” 당장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지독하게, 때론 바보스러울 정도로 느릿느릿 돌아가며 절차적 정의를 지켜나가는 것이 민주주의 힘이고 법치주의의 힘이라는 뜻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선포, 대통령의 탄핵 소추에 대한 헌법 재판을 보며, ‘절차적 정의와 정당성’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여론이 가득하다. 누군 ‘계엄이 절차와 요건도 맞지 않게 선포됐다’고 하고, 누군 ‘탄핵 재판 과정이 졸속이고 편파적’이라 한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내란 피의자이자 탄핵 피청구인인 대통령이 좋건 싫건, 그의 탄핵 또는 직무 복귀가 나라에 도움이 될 것 같건 아니건 간에 그 또한 간첩도 대한민국 법정에서 누린 ‘절차적 정의와 정당성’만큼은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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