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 시민사회수석을 거친 김제남 원자력안전재단 이사장은 지난 2월 3년 임기가 끝났지만 여전히 재직 중이다. 2022년 2월 방사선 안전 연구·개발(R&D) 기관의 수장에 역사학과 출신 환경운동가가 취임하자 ‘알박기’ 낙하산 인사라는 지적과 함께 자질 논란이 불거졌었다. 그는 탈원전 정책을 폐기한 윤 정부 들어서도 친정이자 원전 반대 단체인 녹색연합에 후원금을 내는 등의 행보로 구설에 올랐다.
우리나라 공공기관 339곳 가운데 김 이사장처럼 문재인 정부 시절 임명된 기관장이 여전히 현직을 유지하는 기관이 29곳에 달한다는 기사를 지난 9일 보도했다. 임기를 마치지 않은 기관장을 함부로 내보낼 수 없다는 2022년 초 이른바 ‘환경부 블랙리스트’ 판결 여파다. 이런 가운데 비상계엄과 탄핵에 따른 정치 혼란으로 임기를 마친 문 정부 알박기 기관장의 후임 인선도 지연되고 있다. 새 정부 입장에서 윤 정부가 임명한 기관장들은 길게는 새 정부 임기 반환점을 넘긴 2028년 봄까지 일하게 된다. 이에 새 정부의 공공기관장 인선이 마무리될 때까지 윤 정부와 문 정부, 새 정부 기관장이 공존하는 ‘한 지붕 세 가족’ 진풍경이 벌어진다.
정권 창출에 기여한 인물에게 자리를 주는 엽관제(獵官制) 폐해가 곪을 대로 곪아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전문성도, 대통령의 국정 철학에 대한 공감대도 없는 엉뚱한 인물들이 정치적 논공행상의 결과로 기관장 자리를 꿰차면서 국가 경제는 멍들고 있다. 한국환경공단은 환경운동가 출신 문 정부 알박기 인사인 안병옥 전 환경부 차관이 이사장을 맡은 2021년 말부터 3년 넘게 환경부의 잦은 감사에 시달리다가 조직이 제 기능을 못 했다고 한다. 윤 정부 국정과제비서관과 환경부 차관을 거친 후임 이사장 때도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전기·수도·교통·건강보험 등 공공기관 업무를 정부가 직접 맡지 않는 이유는 이 일을 전담하는 전문 인력을 통해 민간 기업 못지않은 효율을 달성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논공행상 인선이 반복되면서 본래 취지는 무색해졌다. 한국전력·가스공사 등 자체 수입 비율이 높은 ‘시장형 공기업’ 부채 비율은 2023년 말 303.1%로 4년 전의 거의 두 배다.
조기 대선을 앞두고 전대미문의 진풍경이 연출되면서 공공기관장 인선 시스템을 뜯어고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이미 여러 전문가들은 장관이 인사권을 쥐되 추천·검증·임명 전 과정을 실시간으로 공개하는 영국이나 민간 헤드헌팅사까지 동원하는 프랑스 등의 방식을 제안해왔다. 하지만 “어느 정권이 공공기관장 인선이라는 칼자루를 내려놓겠냐”는 회의적인 반응이 많다. 이게 버거우면 주요 기관장 임기를 대통령과 맞추는 미국 방식을 도입해 세 정권 인사가 같은 정권에서 일하는 ‘한 지붕 세 가족’ 진풍경이라도 막자. 새 정부를 이끌겠다는 대선 주자들의 묘안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