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가을 국정원장이 내곡동으로 기자들을 초청했다. 북한 동향 등 주요 사안에 대한 브리핑을 듣고 간부들과 식사했다. 옆에 대공수사국장이 앉았다. 참석자들이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했는데, 수사국장은 ‘얼마 뒤면 개정안에 따라 국정원은 대공 수사를 안 하게 된다’면서 ‘남은 기간 본연의 임무를 다하겠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다. 그의 말은 무미건조한 어휘의 나열이었지만, 비장함이 느껴졌다. 그는 1961년 중앙정보부 창설 이래 줄곧 핵심 부서였던 대공수사국의 마지막 국장이었던 셈이다.
몇 달 뒤 2024년 1월 1일부로 법에 따라 국정원의 대공 수사권은 63년 만에 사라졌다. 많은 언론과 정치인은 대공 수사권이 경찰로 ‘이관(移管)’된 것이라 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경찰이 대공 수사권을 갖지 않은 상태였다가 국정원의 것을 물려받았다면 ‘이관’이 적합한 표현이다. 하지만 경찰은 오래전부터 대공 수사권을 갖고 있었고 그랬기에 국정원과 같이 수사했다. 대공 수사권을 가진 조직이 2개였는데 1개로 ‘축소’됐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대공 수사를 ‘공조’하는 기관 기준으로 보면, 3개에서 1개로 줄었다. 예전엔 검찰이 법리를 따지며 ‘수사 지휘’하는 역할로서 국정원·경찰과 한 팀을 이뤘다. 그런데 2021년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검찰이 경찰을 수사 지휘할 수 없게 됐다. 공조팀에서 검찰이 빠져버렸다. 그간 3각 공조로 이뤄지던 업무를 경찰 혼자 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2013년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 2014년 보위부 간첩 사건 같은 국정원 주도 사건에서 증거 조작, 몰아가기식 심문법 등이 적발돼 논란이 됐다. 권력 기관에 대한 비판과 견제의 필요성은 백번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다. 그러나 일부 직원의 잘못을 바로잡겠다고 그들이 속한 조직의 핵심 기능까지 없애버리는 건 과하다. 전 국민적 원성을 샀던 ‘임대차 3법’ 같은 ‘악법’을 발의했다고 국회의원에 대한 비판을 넘어 입법권까지 박탈한다면, 지금 살아남은 의원은 몇이나 될까.
얼마 전엔 한 대선 후보가 국군방첩사령부의 방첩 기능을 국방부 조사본부로 옮기겠다고 했다. 12·3계엄에 방첩사가 동원돼서라는데, 그렇다고 스파이 활동 막는 방첩 기능은 왜 없애려는 걸까. 가뜩이나 법적 미비로 외국인이 국내 군 기밀 시설을 드론 촬영해도 제대로 처벌 못 하는 상황인데, 그나마 있던 대공 수사 조직들마저 하나둘 사라져가게 둘 것인가.
지난해 중국에선 한국 반도체 기술자가 간첩죄로 체포됐다. 그 무렵 미국에선 CIA 출신 한국계 미국인 수미 테리가 한국 대리인 의심을 받으며 체포됐다. 기술 패권 전쟁이 벌어지고 국제 질서가 재편되는 정세에서 각국은 성벽을 높이 쌓고 내부 단속을 강화하고 있다. 세계 최강국들도 이러는데 분단국에 휴전국인 한국은 성벽을 스스로 허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