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만하면 반복되는 풍경이 있다. 대통령 앞에 불려 나간 기업인들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무언가 열심히 받아 적고 하는 모습이다. 지난 10일에도 청와대에서 같은 장면이 재생 버튼 누른 동영상처럼 재연됐다. 제목은 ‘탄소중립 선도기업 초청 전략보고회.’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과 손경식 한국경총 회장을 비롯한 경제 5단체장과 김기남 삼성전자 종합기술원 회장 등 기업인들이 대거 참석했다.
탄소중립이라는 국가적 어젠다를 논의하기 위해 대통령과 재계 인사들이 만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현실적으로 탄소중립 달성의 주체일 수밖에 없는 기업의 의견을 정책에 반영해 최선의 해법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나 예상하듯 이번에도 생산적 토론과는 거리가 멀었다. 격려라는 형식의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이 있었고, 건의라는 형식으로 기업인들이 몇 마디 했을 뿐이다. 이날 행사는 2050년까지 탄소 실질 배출량을 ‘0(제로)’로 만든다는 내용의 ‘2050 탄소중립 비전’ 선포 1주년을 맞아 마련됐다. 기업 입장에선 정부가 내준 탄소중립이라는 숙제를 지난 1년 동안 얼마나 했나 검사받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워낙 보여주기식 행사를 즐겨하는 청와대를 탓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그러나 재계 대표로 참석한 기업인들의 태도는 아쉬울 수밖에 없다. 최태원 회장은 이날 “에너지 빈국에서 에너지 자립국으로 올라선다는 목표를 세워야 한다”며 “(탄소 감축을 위해) 규제보다 시장 메커니즘이 작동하도록 인센티브를 확대할 필요성이 있다”고 했다. 이에 문 대통령은 “보조금, 세제, 금융 지원을 하고 탄소중립이 고도화될수록 더 많은 지원을 할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제조업 비중이 다른 선진국과 비교해 절대적으로 높고, 재생에너지 환경은 절대적으로 불리한 한국의 상황을 볼 때, 현 정부의 로드맵대로 2050년 탄소중립을 달성하는 게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최 회장을 비롯한 기업인들이 가장 잘 알 것이다. ‘오프 더 레코드(비보도)’라며 들려주는 기업 현장의 목소리만 들어봐도 안다. 한 에너지기업의 탄소중립 실무 담당자는 “회사는 10년 내 탄소 배출량을 절반으로 줄이라고 하는데, 실질적으로 감축할 방법이 없다”며 “탄소배출권을 사올 수밖에 없는데, 결국 돈으로 때우는 것”이라고 했다.
청와대에 불려간 기업인들이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기 어렵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자칫 밉보였다가 공정위·국세청·검찰에 한번 시달려 보면, 입 닫고 있는 게 훨씬 낫다. 하지만 매번 이렇게 할 말 못하고, 스스로 정치적 행사의 병풍(屛風)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으니, 정치 권력과 기업 간의 갑을(甲乙) 관계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이전의 재계 총수들은 지금과 달랐다. 최태원 회장의 부친인 SK 최종현 회장은 IMF 외환 위기 당시 폐암 수술을 받은 상태에서 산소호흡기를 달고 청와대를 찾아 김영삼 당시 대통령에게 금리 인하 등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삼성 이건희 회장은 25년 전 “관료는 3류, 정치는 4류”라고 쓴 소리를 했다가 정권으로부터 단단히 미운털이 박혔다. 때로는 입바른 소리를 했다가, 세무조사를 당한 기업인들도 있다. 그들이라고 자신에게 불이익이 돌아올 것이라는 걸 몰랐을까? 하지만 재계를 대표해서, 우리 경제를 위해 그런 목소리를 내는 게 자신들의 책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3세, 4세 총수들에서 그런 책임감과 결기를 보는 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이번에도 기업인들은 문 대통령 주변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뻔한 사진을 찍는 것으로 행사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