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대선에서 나라 곳간이 거덜나도 상관없다는듯 표(票)를 얻기 위해 수십조원짜리 공약을 남발한 후보들을 보면서 1993년 개봉한 미국 영화 ‘데이브’가 떠올랐다. 빼다 박은 것처럼 닮았다는 이유로 뇌졸중으로 쓰러진 대통령 대역을 맡게된 직업소개소 사장(케빈 클라인 분)이 주인공이다.

1993년 국내 개봉된 미국 코미디영화 데이브 포스터

정치나 행정 경험이 전혀 없는 주인공 데이브는 가짜라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비서실장의 지시대로 대통령 흉내를 내는 꼭두각시일 뿐이었다. 모든 결정은 정권 실세인 비서실장 몫이었다. 그런데 데이브가 노숙자 쉼터를 방문했을 때 약속했던 지원 법안을 비서실장이 “예산이 없다”는 이유로 거부하면서 반전이 일어난다. 주인공이 연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대통령 역할에 충실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비서실장 모르게 회계사인 친구를 불러 도움을 받는다. 그리고 직접 대책회의를 주재하며 불요불급한 다른 예산들을 삭감해 재원을 마련한다. 우리나라 역대 정부가 말로만 떠들어댔던 ‘지출구조조정을 통한 증세 없는 복지’에 성공한 것이다.

그가 서민들의 일자리 예산을 늘려 달라며 의회에서 한 연설이 인상적이다. “의원 여러분들이 직장을 얻은 사람들의 표정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들은 마치 하늘을 날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월급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존중받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비록 영화 속이지만 직업소개소 사장으로서의 경험과 진심이 담긴 명언이다.

영화 데이브에서 졸지에 대통령 대역이 된 데이브(케빈 클라인 분)가 불필요한 예산 삭감을 위해 회계사 친구를 백악관으로 몰래 불러 회의를 하고 있다

성공한 대통령이 되려면 일머리(일을 할 줄 아는 능력)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진정성이 중요하다. 좌·우파가 번갈아 집권한 최근 20년간 일머리와 진정성을 갖춘 대통령은 누가 있었을까. 지지층에 따라 평가가 엇갈리겠지만, 양측 정부에서 모두 일해본 경험이 있는 공무원들은 대부분 노무현·이명박을 꼽는다.

노 전 대통령은 지지층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미FTA(자유무역협정)를 체결했을 뿐 아니라 거부권 행사라는 배수진을 치고 국민연금 개혁이란 난제(難題)를 돌파했다. 세금 폭탄 같은 강력한 수요 억제 정책으로 집값이 잡히지 않자 정책 방향을 선회해 위례신도시라는 파격적 공급 대책을 내놓은 것도 그의 결정이다.

이 전 대통령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가 터지자 매주 비상경제대책회의를 주재하며 위기 극복을 진두 지휘했고, 발 빠르게 한미 통화스와프를 체결해 외환시장 불안을 잠재웠다. 상반기 재정 조기 집행처럼 당시 도입됐던 정책들은 이후 경제 위기 대응의 매뉴얼이 됐다. 우리나라 국가 신용 등급이 일본·중국을 추월한 것도 이때 성과다.

문재인 정부가 소득 주도 성장이나 탈원전 같은 주요 정책을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하면 돼)’식으로 일방 추진한 것과 달리, 두 전임은 활발한 의견 수렴과 토론을 통해 반대 의견이라도 옳다고 생각하면 받아들였다.

재정 건전성 유지는 두 전임의 공통된 목표였다. 2012년 8월 무디스가 한국 신용 등급을 상향 조정할 때 근거로 든 것은 글로벌 금융 위기를 겪고도 국가 채무 비율이 4.1%포인트 증가하는 데 그칠 정도로 재정 건전성이 양호했다는 것이다. 당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 증가 폭은 34.5%포인트였다. 포퓰리즘 공약이 기승을 부렸던 이번 대선의 후유증을 치유하기 위해 꼭 새겨야 할 교훈이다.

앞으로 5년간 국정을 이끌 대통령 당선인에게 영화 데이브의 주인공이 한 말을 전해주고 싶다. “국민들이 대통령에게 기대하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나보다 국민들을 더 챙겨야 합니다. 인기 있는 일(what’s popular)보다는 옳은 일(what’s right)을 챙겨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