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 아르헨티나 대통령으로 정치 신인인 경제학자 하비에르 밀레이가 취임했을 때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뿌리 깊은 포퓰리즘에 중독된 아르헨티나가 대통령 한 명 바뀐다고 달라질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아르헨티나는 손꼽히는 부자 나라였다. 비옥한 초원에서 생산된 대두(콩)와 밀, 쇠고기 등을 수출해 부를 일궜다. 하지만 1946년 후안 페론 정권 집권 이후 퍼주기식 복지 정책으로 몰락했다. 정부 돈이 없으면 중앙은행이 새 돈을 찍어내 충당했다. 당연히 연 100%가 넘는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이 뒤따르는 악순환에 빠졌다. 국가 부도 사태만 총 9번, 시쳇말로 구제불능의 나라였다.
밀레이의 과격한 성향도 불안 요인이었다. 그는 ‘무정부 자본주의자(anarcho-capitalist)’를 자칭한다. 국가 없는 사회를 지향하는 극단적 경제 철학으로, 사법과 국방을 포함한 모든 공공 서비스를 민간 사기업이 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국가는 세금이라는 강제적 소득원으로 유지되는 폭력적인 범죄 조직”이라며 “국가 규모가 커질수록 개인의 자유와 재산이 더 많이 제한된다”고 했다. 비혼주의자인 그는 반려견 4마리를 키우는데 이름이 밀턴, 머리, 로버트, 루커스다. 밀턴 프리드먼과 머리 로스바드, 로버트 루커스 등 정부 개입 최소화를 주장하는 자유주의 경제학자의 이름을 딴 것이다.
게다가 취임 당시 다당제인 아르헨티나 의회는 완벽한 여소야대였다. 밀레이가 이끄는 자유당은 상원 72석 중 7석, 하원 257석 중 40석밖에 안 되는 소수 정당이었다. 반면 페론주의 야당이 상원 33석, 하원 104석으로 원내 1당이었다.
그런데 취임 1주년을 맞은 그에 대한 세계의 평가가 달라졌다. 1년 만에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을 잡고 재정 적자를 흑자로 돌렸기 때문이다. 공약대로 방만한 정부 군살 빼기에 나선 결과다. 그는 정부 부처 18개를 9개로 통폐합한 것을 시작으로 공무원 7만명 감원, 공공사업 87% 중단, 교통·에너지 보조금 삭감 등 고강도 개혁을 쉴 새 없이 밀어붙였다.
여소야대 상황에서는 대통령 혼자의 힘만으로 개혁에 성공할 수 없다. 그는 의회의 지지를 얻기 위해 페론주의 야당을 제외한 중도와 우파 정당 정치인들을 장관으로 기용했다. ‘도둑’이나 ‘범죄자’로 매도했던 기성 정치인들을 배척하지 않고 협치에 나선 것이다.
중앙은행 폐지 같은 과격한 공약도 접었다. 그는 영국 이코노미스트 인터뷰에서 “무정부 자본주의는 이론적이고 철학적인 접근”이라며 선을 그었다. 현실에선 이념에 집착하지 않고 정부 규제를 최대한 없애는 실용주의자로 변신한 것이다. “규칙은 규칙입니다. 축구를 하고 싶으면 11대11로 붙어야 돼요. 축구 규칙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게임을 해야죠.” 정부를 맡았으니 정부 역할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 정치·외교의 변방인 아르헨티나가 주목받게 된 계기는 정부 관료주의와 규제 혁파를 주요 정책으로 내세운 미국 트럼프 2기 정부가 밀레이 개혁을 모범 사례로 평가했기 때문이다. 신설되는 ‘정부효율부(DOGE)’의 수장으로 지명된 일론 머스크는 “연간 6.8조달러의 연방 예산에서 최대 2조달러를 삭감하고 많은 정부기관을 폐지할 수 있다”며 “아르헨티나가 ‘인상적인 진전’을 이뤄냈다”고 했다. 트럼프가 당선 후 제일 먼저 만난 외국 정상이 밀레이다.
밀레이 개혁이 미국에서도 통한다면 정부 군살 빼기는 레이거노믹스나 대처리즘 같은 대세로 확산될 수 있다. 정권 힘이 빠질 때마다 일손을 놓고 복지부동한다는 지적을 받아온 한국 공무원 사회가 바짝 긴장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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