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짓는 독이 꽉 찼다. 3년 치 예약도 끝났다. 국내 ‘빅3’ 조선소의 현황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 조선업과 협력을 원한다’는 발언으로 글로벌 명성까지 얻었다. 그런데 K 조선업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갈수록 뚝뚝 떨어진다. 왜일까. 이유를 찾아 울산과 거제의 ‘빅3’ 조선소 현장부터 가보자.
울산의 HD현대중공업 조선소에서 건조 중인 선박은 59척. 만석이다. 10개의 독 중 가장 큰 ‘제3 독’에서만 LNG 운반선 2척, LPG 운반선 1척, 초대형 에탄 운반선 1척 등 4척이 건조 중이다. 앞으로 3년 동안 지을 배의 목록도 정해져 있다. 거제의 한화오션이나 삼성중공업도 마찬가지다. 인근의 중견 조선소인 HJ중공업(옛 한진중공업)도 빅3가 감당 못 한 물량 덕분에 대호황이다. 같은 중견 조선소인 케이조선(옛 STX조선해양), 대한조선도 그렇다. 그런데 한국 조선업의 호황은 딱 여기까지다. 한때 10개가 넘던 중견 조선소들은 ‘중국 쇼크’로 모두 문 닫았다.
K조선업의 수주 물량은 역대급 호황이던 2014년 수준인데, 세계 시장 점유율은 10년 새 30%에서 17%로 급감했다. 같은 기간 세계 조선 시장이 66% 커졌지만 대부분 중국이 가져갔다.
조선 호황이 이어져도 우리의 점유율, 주도권은 갈수록 줄 것이다. 그나마 수혜도 빅3 정도에 국한되고, 노동자들도 점점 외국인이 많아져 내수 진작 효과도 제한적이다. K조선업의 메카인 경남 거제시의 청년 인구(20~39세)는 전국 228개 기초자치단체 중 가장 빠른 감소세다. 2014년 7만7244명에서 지금 4만2925명이다. 청년들이 ‘바닷가 조선소’를 외면하는 측면도 있다. 그 자리를 외국인이 채운다. 작년 말 거제의 외국인 거주자는 2년 전 대비 160% 늘어난 1만4969명이다.
생태계가 무너지니, 호황이라고 물량을 더 소화하거나, 조선소를 더 짓기도 어렵다. ‘트럼프 주문’이 오면 ‘새치기’로 만들어줘야 할 판이다. 조선사들은 단골손님을 포기 못 해 곤혹스러워한다. 그나마 K조선업의 추가 투자는 해외에 짓거나 해외 기업을 인수하는 수준이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 나빠질 일만 남았지 좋아질 기미가 안 보인다는 것이다. 조선업 연구개발(R&D) 인력 역시 한국은 고작 1300명인데, 중국은 14배인 1만8000명이다.
제조업은 같은 일을 반복하고, 육체적 노동이 많고, 수익성은 낮아 흔히 선진국에서 후진국으로 대물림해주는 산업이라 한다. 한때는 조선은 물론 메모리 반도체, 배터리 등도 소득 2만달러 나라는 안 한다는 게 불문율 같았다. 그래서 조선업도 영국,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왔던 것이다. 그런데 제조업에 대한 시선이 달라졌다. 어느 나라든 제조업 일자리 없이 성장은커녕 현상 유지도 못 한다. 제조업을 서둘러 포기한 선진국들의 경제 성적표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상당수 기업인은 “중국이 이미 시작한 산업은 포기해야 한다”고 한다. 일견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대안이 있는가. 로봇과 AI(인공지능)가 노동의 종말을 고할 거라 하지만 제조업 중요성은 단번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트럼프가 제조업 부흥을 외치는 몸부림이 이를 증명한다.
지금이라도 제조업을 어떻게 지켜낼지 머리를 맞대야 한다. 대체할 방도는 잘 안 보이지만 쉽게 포기해선 안 된다. 산업 현장은 쇠락 중이고, 우리는 이걸 숙명처럼 바라보고만 있다. 세계 최고 제조업 경쟁력의 나라가 ‘제조업 부흥’을 남의 일로 봐서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