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경호 경제부총리가 “최근 시장 상황을 감안해 국고채 발행 물량을 당초 목표보다 과감히 축소하겠다”고 밝혔다. 국고채 발행을 줄여서라도 시중 금리를 낮추고 채권 시장을 진정시키겠다는 의미다. 앞서 정부가 50조원 규모의 유동성을 공급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심각한 자금 경색을 풀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5대 그룹의 핵심 계열사들마저 회사채 발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을 만큼 심각한 상황이 돼버렸다.

급속한 금리 인상으로 시중 자금이 안전한 은행으로 몰리고 있다. 은행 수신액이 지난 한 달 사이에만 36조원이나 늘어 관련 통계 작성 이후 최대 증가 폭을 기록했다. 돈이 은행으로 몰리니 주식·채권시장에서는 정상적인 기업들도 채권 발행이나 자본 유치에 곤란을 겪는 ‘돈맥 경화’ 현상이 심각하다. 자금 조달에 차질을 빚자 현대차가 올해 투자 계획을 축소하고, SK하이닉스가 4조원 규모의 반도체 공장 증설을 보류하는 등 긴축 경영에 돌입했다. 부동산 경기 위축으로 어려움을 겪는 건설업계에선 연쇄 도산의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전 정부 시절 탈원전과 전기료 인상 미루기로 부실화된 한국전력이 시중 자금을 빨아들이며 자금난을 심화시키고 있다. 올 상반기에만 14조원의 천문학적 적자를 낸 한전이 모자라는 자금을 메우기 위해 채권을 무더기로 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전은 채권 물량이 워낙 많아 제대로 소화되지 않자 금리를 연 5.9%까지 올렸다. 한전은 이런 고금리 채권을 올해 들어서만 작년의 두 배가 훨씬 넘는 23조원어치나 발행했다. 그 결과 다른 기업들의 회사채는 아무리 신용도가 좋아도 팔리지 않고 있다. 지난달 회사채 발행 규모는 작년 같은 기간보다 37%나 줄었다. 여기에다 레고랜드의 채무불이행 논란이 터져 자본시장이 더 얼어붙어 버렸다.

실물 경기도 빠르게 하강하고 있다. 1위 수출 품목인 반도체 경기가 내리막을 타면서 SK하이닉스의 3분기 영업이익이 60% 급감했다. 삼성전자도 영업이익이 30% 줄었고 포스코홀딩스는 무려 71%나 격감했다. 내년은 더 걱정이다. 이미 하강 국면으로 접어든 기업 경영 실적이 내년에는 더 악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기업들의 체력이 약해진 상황에서 금융시장 경색이 겹치면 기업 재무구조가 위험해진다. 기업들 단기차입금 규모가 사상 최대인 532조원에 달한다. ‘돈맥 경화’가 심각한 상황에서 실물 경기 침체까지 겹치면 정상적 기업도 버티지 못할 수 있다. 어떤 수단 방법을 쓰더라도 우량 기업이 일시적 자금난으로 무너지는 흑자 도산 사태는 막아야 한다.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경제의 위기 관리에 총력전을 펼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