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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전 대통령./이승만대통령 기념재단 제공

젓갈로 유명한 전라북도 부안군 곰소항 바로 옆 줄포는 개항기와 일제강점기의 모순이 압축된 곳이다. 조선 대표 기업가이자 지주였던 김성수·김연수 일가의 거점이 바로 줄포에 있었다. 동북쪽으로 약 10km 떨어진 곳에 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된 고부관아 터가 있다.

대표 지주 가문의 성장과 대규모 농민 반란이 한 공간에서 시작된 건 우연이 아니다. 지금은 갯벌이 쌓여 항구 기능을 상실했지만, 줄포는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쌀이 서울이나 대외 교역항으로 수송되는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개항 이후 일본으로 쌀 수출이 이뤄지면서 김씨 일가처럼 기회를 잡은 중소 지주들은 벌어들인 돈으로 땅을 사고 개간해 빠른 속도로 대지주로 성장했다. 하지만 평범한 농민들의 사정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동시에 구한말 관리들은 갖가지 명목으로 쌀로 세금을 걷은 뒤 몰래 팔아치워 축재하기 일쑤였다. 1930년대까지 지주들의 토지 보유 규모는 증가일로였다.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 속에서 1949년 농지개혁이 빈번히 언급된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몇천 년 동안 농사를 지어온 나라로, 특이한 점은 해방 이후 ‘지주 계급’이 없어졌다”며 “대한민국이 이 자리에 오게 한 결정적 장면”이라고 말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농지개혁을 단순히 봉건적 지주제를 없앤 사건만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식민지 경제 구조의 핵심은 쌀 단작 플랜테이션이었다. 일제강점기 다수의 지주들은 농업 기업가나 마찬가지였다. 농지개혁은 식민지의 잔재를 뿌리에서부터 청산하는 행위였다.

다른 나라와 달리 한국의 농지개혁은 국민들이 스스로 뽑은 국회의원과 대통령이 정치적 갈등과 타협의 과정을 거친 결과였다. 이 전 대통령은 의회 민주주의 틀 내에서 성과를 내고, 국정의 주도권을 쥐었다. 이 전 대통령은 조봉암의 농림부와 국회 내 소장파, 그리고 지주들에게 유리한 수정안을 낸 민주국민당 주도의 국회 다수파 양쪽에 거리를 두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했다. 그 결과 경쟁 세력이던 민국당의 기반인 지주는 큰 타격을 입었다.

농지개혁은 먹고사는 문제로 쟁점을 만들고, 그 과정에서 정치적 자본을 획득하는 고전적인 성공 모델이다. 고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는 1950년 5월 총선에서 진보적 중도파가 약진하는 가운데, 이 전 대통령에게 우호적인 세력은 건재했다고 평가한다. 몰락한 것은 민국당이었다. 1956년 선거에서도 농촌에서 나타난 자유당 당세는 반지주 정서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자유당은 적극적으로 농지개혁 성과를 내세웠다. 민국당 후신인 민주당이 집권하면 농지개혁을 전복시킬 것이란 네거티브 캠페인도 함께였다.

이 전 대통령의 정치가 밝은 측면만 있는 건 아니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처럼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다면 좌우를 막론하고 이견 없이 국부로 추앙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기반한 정치 세력은 근대적 정당 조직과 거리가 멀었고, 이 대통령 없이는 유지될 수 없었다. 1인 초우위 정당은 대안과 퇴로가 없는 정치로 이어지고, 4·19와 하야라는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하게 됐다.

보수가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승만 바로 세우기를 넘어 명암이 뚜렷한 그의 정치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민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발본적으로 해결하고 대안을 내놓아야 성공한다는 사실을 오늘날의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안다. 동시에 ‘親○’으로 불리기도 하는 개인 중심 정치가 얼마나 취약하고, 결국은 막다른 골목에 몰리게 되는지도 마찬가지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정치가 어떻게 성공했고 왜 실패했는가. 우리가 그의 ‘농지개혁’을 지금 다시 짚어봐야 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