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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이승환(60)씨의 통렬한 자기반성은 자못 감동적이었다. 며칠 전 그가 페이스북에 ‘노인’과 ‘어른’에 대한 소고(小考)를 남겼다. “노인과 어른은 구분돼야 합니다. 얕고 알량한 지식, 빈곤한 철학으로 그 긴 세월에도 통찰이나 지혜를 갖지 못하고 그저 오래만 살았다면 노인입니다. 어른은 귀하고 드뭅니다.” 작은 키와 앳된 얼굴로 한때 ‘어린왕자’로 불린 이씨가 이제 환갑이라는 사실에 기함하다가도, 세월 앞에 누구나 공평하다는 진실에 잠시 숙연해진다.

혹자는 저 글이 가수 나훈아(78)씨에 대한 저격이라고 수군대지만 동의하지 않는다. 그간 이씨의 언행이 다소 가벼웠다고는 하나, 그 정도로 경솔할 리는 없기 때문이다. 대(大)선배에 대한 예의도 예의거니와. 이 사람이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가 쏘아붙이기 전에, 잠시 고개를 끄덕여줄 수도 있어야 할 것이다. 새해 아닌가. 음원 순위보다 편향된 정치적 행보로 더 자주 거론되는, 점차 대중의 평판에서 노쇠해지는 스스로에게 던진 각성의 메시지는 아니었을까?

“너희 하는 꼬락서니가 정말 국가를 위해서 하는 짓거리인지 묻고 싶다”고 나훈아씨는 작심 발언을 했다. 지난주 은퇴 공연 무대에서였다. “이런 상황을 북쪽의 김정은이 좋아한다”고 호통을 쳤다. 가수 인생을 마무리하는 자리에서 이 정도로 말했다면 단단히 각오했을 것이다. 발끈한 야당 인사들은 잇따라 반발했다. 이틀 뒤 공연에서 나훈아씨는 “어디 어른이 얘기하는데 ××들을 하느냐”며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다 문제라고 한 것”이라고 또다시 꾸짖었다. ‘어른’의 질책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모 좌파 시사평론가는 “비열한 노인”이라고 했다. 어른이냐 노인이냐, 느닷없는 정체성 논란이 불붙은 배경이다.

/정상혁 기자·DALL·E
/정상혁 기자·DALL·E

그러나 이 오래된 이분법은 더는 유효하지 않다. 강직한 어른으로 추앙되거나 노망난 늙은이로 전락하는 건 이제 지혜가 아니라 진영에 달렸기 때문이다. “어른은 귀하고 드물다”는 지적은 타당하다. 어디선가 어른이 나타나도 그가 얻을 수 있는 지지는 언제나 절반에 불과한 까닭이다. 정파를 초월해 의견을 나누고 존경을 표하던 미풍양속은 별세했다. 견해가 다르면 적(敵)으로 돌변해 찌른다. 경청이 사라진 자리에 조롱이 판친다. 팔순이 다 된 원로에게도 “입 닫고 그냥 갈 것이지 무슨 오지랖”(현직 국회의원이 쓴 글이다) 같은 비난이 난무한다. 언제 이렇게까지 싸가지 없는 세상이 됐는가, 이제 겨우 불혹을 앞둔 본 기자는 개탄한다.

반목이 일상이 된 사이 나라는 빠르게 늙어가고 있다. 남북으로 나뉘고, 좌우로 나뉘고, 세대로 나뉘어 싸우느라 기력이 쇠해간다. “모든 세대는 자신이 이전 세대보다 더 똑똑하고 다음 세대보다 현명하다고 생각”(조지 오웰)하며 살아간다. 나이로 대접받는 시대는 일찍이 지나갔다. “나이가 들었다고 현명해지는 건 아니며”(헤밍웨이) 어쩌면 나이와는 무관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안 그래도 작은 땅에 경상도가 어쩌니 전라도가 어쩌니 ××들을 하고 앉아있다… 우리 후세에 이런 나라를 물려주면 안 된다, 갈라치기는 안 된다” 같은 너무도 상식적인 훈계에도 귀를 닫고 있다는 점이다. 모두가 두꺼운 아집을 뒤집어쓴 채 늙어간다. 지금 대한민국은 분명 초고령사회가 맞다.

난청은 치매를 부추긴다. 분별 있는 젊은 시절을 보낸 이에게는 지혜로운 노년이, 욕망에 사로잡힌 젊음을 보낸 이에게는 영혼의 빛이 소멸된 노년이 온다(키케로 ‘노년에 관하여’)고 한다. 국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부터 서로 조금 더 듣고, 조금 덜 미워하는 방법뿐. 뭣보다, 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