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e
00:00
 2018년 7월 16일 핀란드 헬싱키의 대통령궁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회담을 시작하며 악수하고 있다./AP 연합뉴스
2018년 7월 16일 핀란드 헬싱키의 대통령궁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회담을 시작하며 악수하고 있다./AP 연합뉴스

소련의 붉은 군대 합창단(Red Army Choir)이 미국 워싱턴 DC 케네디 센터 무대에 오른 것은 1989년 12월 3일이었다. 케네디 센터가 매년 미국 문화에 공헌한 예술인들에게 주는 명예상 시상식 갈라쇼였다. 카키색 군복을 입은 무용수들이 댄스와 곡예로 흥을 돋우는 영상이 유튜브에 남아 있다.

이어서 지휘자가 등장하고 합창단이 ‘갓 블레스 아메리카(God Bless America)’를 부르기 시작한다. 베를린 장벽 붕괴(11월 9일) 직후의 해빙기였다곤 해도 관객들은 적군 합창단이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라고 노래하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객석의 유명 여배우 모린 스테이플턴이 딱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손으로 가리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노래하는 단원들 표정에도 뿌듯함이 묻어난다. 역사의 현장에 서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로부터 2년 뒤 소련이 해체되고 냉전이 끝났다.

핵전쟁 공포 속에 자라 베트남전에 참전했다는 이가 “이 공연을 본 날 마침내 다 끝났다는 생각에 아이처럼 울었다”고 댓글을 달았다. 스스로 스물두 살이라고 소개한 이는 공연 당시 64세였던 스테이플턴을 가리켜 “내 인생의 두 배에 걸쳐 냉전을 겪은 그녀가 보기엔 초현실적인 장면이었을 것”이라면서 “때론 기적이 일어나고, 인간의 품위가 이긴다는 것을 보여준 무대”라고 썼다. 이 영상이 세대를 뛰어넘어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화합·평화·희망 같은 보편적 가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36년이 지난 지금 미국은 또다시 러시아에 손을 내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2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통화하고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을 위한 협상을 시작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양국의 우호를 강조하고자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함께 싸운 역사까지 언급했다고 한다.

전쟁을 끝내는 일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푸틴과) 우리가 협력해서 얻게 될 위대한 이익에 대해 논의했다”는 발언은 가치보다 타산을 중시하는 관점을 보여준다. 실제 트럼프는 얻을 것이 많다. ‘전쟁을 막지 못한’ 조 바이든 전 대통령과 ‘외국 퍼주기를 끝내고 국익을 지킨’ 자신을 대비시킬 수 있다. 종전 공로를 내세워 노벨평화상을 노릴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트럼프는 “우크라이나의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은 실용적이지 않다”고 했고, 우크라이나의 영토 수복에 대해선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고 했다. 우크라이나가 요구해온 종전 조건은 묵살하고 러시아 주장을 그대로 수용한 듯한 발언이다. 강대국 아닌 나라의 자주(自主)는 어디서 설 자리를 찾아야 하나.

12일은 마침 트럼프가 케네디 센터 이사회 의장직에 오른 날이기도 했다. 트럼프는 데버러 러터 케네디 센터 대표를 해임하고 자신의 측근 리처드 그리넬 대북 특사를 임시 대표에 앉혔다. 백악관 비서실장, 부비서실장, 부통령 배우자를 이사회에 포진시켰다. 워싱턴 DC를 대표하는 이 공연장을 ‘매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가 장악한 것이다.

트럼프는 “더는 드래그 쇼(여장 남자 공연)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바이든 정부 시절 진보 색채 공연이 많이 열린 점을 문제 삼은 것이다. 다양성과 평등만이 중요한 가치는 아니지만, 트럼프가 내세우는 매가는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가치보다는 지지자를 규합하는 구호에 가깝다. 조만간 열혈 트럼프 지지자인 가수 리 그린우드가 케네디 센터 무대에서 단골 선거 유세곡 ‘갓 블레스 디 유에스에이(God Bless the USA)’를 부르는 모습이 유튜브에 올라올지도 모르겠다. 제목은 비슷하지만 1989년의 ‘갓 블레스 아메리카’만큼 감동적이지는 못할 것 같다.

매일 조선일보에 실린 칼럼 5개가 담긴 뉴스레터를 받아보세요. 세상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91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