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ncel
Cancel
live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5일 워싱턴 백악관 집무실에서 보안 허가 취소에 관한 각서에 서명하고 있다./AP 연합뉴스

태평양전쟁 때 미군의 후방 기지였던 남태평양 섬나라 바누아투에선 매년 2월 15일 특별한 의식이 거행된다. 원주민 남성들이 낡은 미군 군복이나 ‘USA’가 큼지막이 적힌 옷을 입고 대나무로 만든 가짜 총을 메고서 성조기를 들고 엄숙하게 걷는다. 일명 화물 숭배(Cargo Cult) 종교로, 전쟁 당시 미군이 수송기로 실어 날랐던 벼락 같은 풍요의 기억을 잊지 못하는 원주민들이 그때의 미군 모습을 흉내 내면 다시 화물이 쏟아지리라는 믿음으로 이런 의식을 매년 치르는 것이다. 미군 기지가 있었던 남태평양 멜라네시아 권역 곳곳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성조기를 성스럽게 다룬다는데, 유독 바누아투에서 2월 15일을 특별히 여기는 이유는 물자를 쫙쫙 뿌려주던 존 프롬(John Frum)이라는 신비로운 미국 남자(미군 수송 담당자였을 수 있다)가 이날 다시 돌아오겠노라고 약속했다는 설화에 기반한다.

대한민국 현대사에도 ‘존 프롬’이 여럿 있다. 그중에서도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한국인이라면 못 잊을 이름이다. 원자폭탄 투하를 승인했던 트루먼 대통령은 6·25 전쟁이 발발하자 즉시 UN 안보리를 소집해 미군의 참전을 결정했고,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쟁의 흐름을 뒤바꿨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휴전 협정과 더불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 안보 동맹의 기틀을 놨고, 경제 원조도 아끼지 않아 ‘한강의 기적’ 발판을 만들어줬다. 어디선가 짠하고 나타나 가난한 캔디를 아낌없이 도와주는, 훤칠한 재벌 테리우스 아저씨가 지금껏 우리가 알던 미국이었다.

‘한국에 가다(Go to Korea).’ 요즘에야 한국 관광을 뜻하지만, 6·25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졌던 1952년 가을에는 ‘골칫거리를 정면 돌파한다’는 의미의 숙어로 통했다. 이 무렵 미 대선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했던 아이젠하워는 민주당 트루먼 행정부가 제대로 대처 못한 세 가지를 ‘K1 C2’, 즉 한국(Korea)과 공산주의(Communism), 부패(Corruption)로 꼽았는데 언급 순서에서 보듯 한국이 으뜸 골칫거리였다. 2차 세계대전의 영웅 아이젠하워는 대선 투표일을 열흘 앞둔 10월의 어느 날 “I shall go to Korea(내가 한국에 가겠다)”라며 전쟁의 출구 전략을 세우겠다는 연설로 당선을 매조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약속대로 당선 직후 한국에 와서 전선을 살폈고, 이듬해 휴전 협정을 진두지휘했다.

그러나 2025년,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가지 않는다. 대의명분보다 돈에 진심인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희토류를 내놓으라고 협박하면서 종전 협상은 침략국인 러시아와 둘이서 한다. 요즘 테리우스 아저씨는 약소국을 돕기는커녕 관세 전쟁을 일으키고 캐나다와 파나마 운하, 그린란드, 가자지구 등을 호시탐탐 노리는 성난 포식자로 변했다. 이런 그에게 ‘대행민국’을 향한 너그럽고 따뜻한 관심을 기대할 수 있을까. 오히려 캔디도 세계 10위권의 ‘머니 머신’으로 컸으니, 방위비도 관세도 전보다 훨씬 많이 내라는 독촉장만 한아름 날아올 판이다.

한국 기업인들이 최근 미국 정부를 찾아가 ‘70년 동맹’을 호소했지만 돌아온 답은 “10억달러 투자” 강권이었다. 미국은 UN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는 결의안 채택 표결에도 반대표를 던졌다. 지정학 전략가 피터 자이한이 예고했던, 우리가 알던 미국이 없어진 세계(The Absent Superpower)가 성큼 열렸다. 아무리 애타게 성조기를 흔들어도 존 프롬이 다시 나타날 리 없는 2025년. 탄핵의 강과 불신의 바다를 건너 격변하는 글로벌 무대에서 생존할 방법을 찾는 일도 이번엔 오롯이 대한의 사람들끼리 해내야 한다. 상황이 이런데도 한국 정치의 인질극이 끝날 기미가 안 보인다.


매일 조선일보에 실린 칼럼 5개가 담긴 뉴스레터를 받아보세요. 세상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91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