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만난 인공지능(AI) 기업의 임원은 손바닥으로 연신 얼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래봤자 얼굴에 드리워진 피로의 그늘은 가시지 않았다. 지난달부터 여당·야당과의 간담회, 공청회, 정치권의 기업 방문 등이 이어졌다. 그는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데 일할 수 있는 시간이 더 줄어들었다”고 했다. 누구나 이름 한번쯤 들어본 국내 AI 기업은, 크기를 막론하고 사정이 다 비슷하다. 이쯤되면, 정치 문외한인 나도 알 수 있다. 지금 장(場)이 섰고, 이 장에서 잘 팔리는 상품은 AI다.
참석자 10명이서 한두시간 간담회를 하면 끝나는 것 같지만 여기에 투입된 자원이 그 10배는 된다. 정보기술(IT)·전자 대기업 임원은 “선거 앞두고 사진 찍기 좋은 곳을 골라서 가는데, 그 사진 한 장을 위해서 기업은 며칠 동안 거기에만 신경을 쓴다”고 했다. 그럼에도 장에서 인기 상품이 된다면 나쁠 게 없다. 장을 세우는 데 들어가는 인력이나 시간은 홍보 비용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문제는 AI가 잘 팔리는 상품임에도 제값을 받지 못하는 거다.
최근 간담회나 공청회에서 업계가 공통으로 꺼낸 얘기는 ‘인프라 투자’였다. 일론 머스크의 xAI는 엔비디아의 그래픽처리장치(GPU) H100 20만장을 갖고 ‘그록3’를 빠른 시간 안에 개발했다. 업계는 국내 AI 기업들이 보유한 H100을 다 합쳐도 xAI의 10분의 1도 안 된다고 추정한다. H100을 포함해 AI 반도체를 더 확보하기 위한 지원을 해달라는 게 업계 입장이다. 지원을 받아 개발한 AI를 공공 서비스 부분에도 적용하겠다는 제안도 했다. 하지만 업계 관계자를 만난 정치인들은 업계에서 필요하다고 한 적도 없는 ‘AI 무상 교육’과 ‘AI 인재 양성’ 얘기를 반복했다. AI 기업 관계자는 “우리가 아무리 입을 모아 얘기해도 이해를 못 하는 것 같다”고 했다.
이해를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듣는 것에 가깝다. 장이 서자 정치권에선 “모든 국민이 무료로 생성형 AI를 쓸 기회를 만들고 싶다”거나 “한국에 엔비디아 같은 회사가 생겨 민간이 지분 70%를 갖고 30%는 국민이 나눠 가지면 세금을 걷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오지 않겠느냐” 같은 얘기도 나왔다. ‘무료’, ‘AI’, ‘엔비디아’, ‘세금’ 등 장에서 잘 팔릴 만한 상품은 다 모아놓은 덕분에 화제는 됐다. 하지만 AI나 반도체, 아니면 하다못해 투자 업계 관계자한테 한 마디라도 얘기를 듣고 내놓은 주장은 아닐 것이다. 만에 하나, 업계 관계자에게 조언을 받아 꺼낸 제안이라면, 당장이라도 그 사람을 멀리해야 한다. 일단, 정치인이 따로 기회를 만들지 않아도, 오픈AI의 챗GPT와 구글의 제미나이 등 생성형 AI는 지금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 엔비디아가 될 만한 스타트업을 고를 혜안과 그 회사를 엔비디아처럼 키워낼 역량이 있다면, 정치인이 아니라 벤처 캐피털리스트로 성공하는 게 훨씬 빠를 것이다.
AI 업계를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기분만 상하게 만들기도 한다. 공청회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는 의원으로부터 내용이 모호하고 앞뒤도 안 맞는 질문을 받아 말문이 막혔다고 했다. 심지어 그 질문의 의도는 다분히 공격적이었다. 부끄럽지만, 그 의원의 심정은 내가 잘 이해한다. 인터뷰를 하러 가서 가끔 잘난 척을 하고 싶거나 잘 모르는 것을 숨기고 싶을 때 어려운 단어를 섞어서 장황한 질문을 하곤 한다. 그 의원도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우리는 남의 집에 갈 때 작은 선물을 갖고 가야 한다고 가정 교육을 받는다. 행여나 빈손으로 가게 되더라도 민폐는 끼치지 말아야 한다. 큰 장이 섰으니 팔릴 만한 물건은 부디 제값을 받길 바란다.
매일 조선일보에 실린 칼럼 5개가 담긴 뉴스레터를 받아보세요. 세상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91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