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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2월 18일 자신의 소유인 플로리다주 팜비치의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연설하기 위해 기자회견장에 입장하고 있다./AP 연합뉴스

“1933년의 스탈린, 1937년의 히틀러, 그리고 2025년의 트럼프가 어떤 일을 했는가.”

지난주 인터넷 디자인 잡지 디진(dezeen)에 실린 한 칼럼은 이런 질문으로 시작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올해 1월 20일 취임 당일에 서명한 행정명령을 역사 속 독재자들에 빗대 비판한 글이었다. 칼럼이 지목한 행정명령은 “공공 건축물을 디자인할 때 지역적·전통적·고전적 건축 유산을 존중해 공간을 아름답게” 하라는 내용이다. 관세나 불법 이주자 차단 같은 빅이슈에 가려 발령 당시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글은 “현대건축에 대한 스탈린의 숙청은 1933년에 시작됐다”면서 그 무렵 소련 아방가르드 건축가들이 잇따라 설 자리를 잃었던 일을 언급한다. 1937년에는 나치가 ‘퇴폐 미술전’을 열고 ‘국가의 이상에 걸맞지 않은’ 20세기 예술을 척결 대상으로 규정했다. “스탈린과 히틀러 모두 정부 건축물이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흔적처럼 보이도록 명령해 모더니즘 건축의 발전을 막으려 했다. (트럼프까지) 세 독재적 지도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미래에 대한 낙관을 담은 모든 건축을 억압한다는 것이다.” 글쓴이는 스티븐 홀. 2001년 시사 주간지 타임이 “그의 건축은 눈과 정신을 모두 만족시킨다”는 평가와 함께 최고의 미국 건축가로 선정했던 인물이다.

고전미·전통미에 대한 트럼프의 애호는 집요하다. 트럼프는 첫 임기 종료 직전에도 연방 정부 건축물은 “아름다워야” 한다며 고전미와 전통미를 권장 스타일로 규정하는 행정명령을 발동했다. 여기에 특정한 양식을 배척하는 내용은 없었지만, 그 초안에는 해체주의와 브루탈리즘(콘크리트로 단순하면서도 과감한 형태를 빚어내는 건축 양식)을 비판하는 내용이 포함돼 미국건축가협회의 항의를 받았다. 매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구호 앞에서 미감(美感)도 예외가 되지 못한다. 추구하는 미감이 복고적이라는 점에서 MAGA의 핵심은 ‘위대하게’가 아니라 ‘다시’에 있는지도 모른다.

복고는 퇴행이고 모더니즘이 진보라고 도식화하기는 물론 어렵다. 홀은 칼럼에서 올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작인 영화 ‘브루탈리스트’의 실제 모델 마르셀 브로이어(1902~1981)를 언급하면서 대표작인 미네소타주 세인트존스 수도원을 “추상적이고 혁신적인 형태로 모더니즘의 언어를 구현한 고무적 사례”로 소개했다. 그러나 브로이어가 워싱턴 DC에 설계한 또 다른 브루탈리즘 건축물 로버트 C 위버 빌딩(도시개발부 본부)은 삭막하고 우울한 콘크리트 덩어리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마음껏 창의를 펼칠 수 있는 자유다. 헝가리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바우하우스에 몸담았던 브로이어가 모더니즘을 탄압하고 바우하우스를 폐교시킨 나치 치하의 유럽에 남았다면 재능을 꽃피우기가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브로이어는 미국으로 건너와 자유를 얻은 끝에 만개할 수 있었다. 공공 건물로 대상을 한정했다고는 하지만, 특정 스타일을 사실상 강제하기 위해 국가 권력을 동원하려는 트럼프의 행정명령은 그런 의미에서 불길하다.

트럼프의 두 번째 임기가 시작된 이후 세계는 급변하는 중이다. 멕시코만이 아메리카만으로 바뀌고, 유럽이 핵무장을 주장하고, 미국이 유엔에서 북한·러시아와 같은 편에 서서 투표하는 것처럼 지금껏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 ‘트럼프 스타일’을 추종하는 이들이 더 많은 나라에서 권력을 잡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그때의 세계가 그다지 ‘위대할’ 것 같지는 않다. 자유무역이 퇴조하고 국경의 벽이 높아진 세상 못지않게, 권력자가 취향까지 강요하는 세상이야말로 우울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