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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서 여자로 태어나느니 소로 나는 게 낫다고 울 엄마가 그러데요.”

화제의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주인공 애순의 어린 시절은 기구하기만 하다. 서울을 동경하는 문학소녀의 꿈은 지독한 가난 앞에 번번이 좌초된다. 공부를 제법 잘했음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대학 진학의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대신 그녀의 작은아버지는 종손을 위해 여공이 될 것을 요구한다. 식모살이에 이골이 난 애순이 할 수 있었던 건 “내 자식은 이렇게 살지 않게 하겠다”는 다짐뿐이었다.

‘폭싹 속았수다’에선 여성 서사가 한 축을 이룬다. 작품은 1951년생 오애순과 그 세대 여성들이 겪어야만 했던 차별, 설움을 격정적으로 그려낸다. 동생들을 위해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지만 밥상머리에서조차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 이와 같은 여성 서사에서 남성들은 부득이하게 못난 존재로 그려지곤 한다. 박보검이 연기한 관식은 현실에서 존재하기 어려운 예외적 인물이다. 보통은 무능하고 지질한 남성들이 여성 주인공의 성취 혹은 좌절을 돋보이게 한다.

그런 까닭에 지금까지 여성 서사를 다룬 콘텐츠들은 “과장이 심하다”거나 “남성을 악마화한다”는 등의 이유로 남성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됐었다. 작품 평점을 놓고 남녀가 공방을 벌이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그런데 ‘폭싹 속았수다’는 사뭇 다르다. 여성 서사가 핵심 얼개를 이루는 이 작품에 2030 남성들이 열광하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남성 중심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드라마를 보고 울었다”는 시청 소감이 끊이지 않는다. 젊은 남성들도 애순과 같은 중·노년 여성들이 경험한 설움에 공감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2030의 남녀 갈등은 남성들이 ‘여성은 약자’라는, 오랫동안 유지돼 온 사회적 합의로부터 이탈한 데서 비롯됐다. 실제로 1980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여성의 고등학교 취학률은 56.2%에 그쳤다. 대학교 취학률도 8.1%로 남성의 절반 정도였다. 이 시대를 경험한 세대는 ‘여성은 약자’라는 명제에 반기를 들지 않는다. 상황이 달라진 건 2000년대부터다. 여성의 대학 진학률은 2009년 남성을 처음 앞지른 이래 줄곧 5~7%포인트 정도의 격차를 유지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 남녀공학이 본격적으로 확대됐다. 남학생 학부모들이 내신을 이유로 남녀공학을 기피하는 일도 흔하게 일어났다. 학교에서 치이는데 스무 살이 넘으면 군대도 가야 한다. 청년 남성들이 “왜 우리 또래 여성들이 약자냐”고 항변하는 이유다.

2030 남성들은 가부장적인 마초인가? 각종 연구에 따르면 이 집단의 성평등 의식은 기성세대 남성은 물론 중장년 여성보다도 높은 걸로 나온다. 여성가족부가 2022년 공개한 ‘2021년 양성평등 실태조사’에서도 가사·돌봄 분담, 성역할 등에 있어 “기성세대가 암묵적으로 갖고 있던 성 고정관념이 청년층에서 완화되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특별난 게 있다면 반페미니즘 정서가 강하다는 정도다.

‘폭싹 속았수다’를 향한 청년 남성들의 호응은 남녀 갈등 해결의 실마리를 보여준다. 지금까지 정치권은 남녀 간 차이를 부각하는 식으로 갈등을 키워왔다. “구조적 성차별이 있냐 없냐”로 싸웠던 지난 대선이 그랬다. 의견이 조금만 달라도 ‘여성 혐오’ 딱지를 붙였다. 그게 남성들의 반발을 더욱 키웠다. 그렇다면 반대로 공통점에 주목하는 건 어떨까. 또래 여성들이 차별받은 집단인가에 대한 이견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수많은 ‘애순이’들이 경험한 차별은 2030 남성들도 부정하지 않는다. 중·노년 여성들은 여전히 열악한 위치에 놓여 있다. 노후 대비는커녕 저임금·고강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이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면, 골이 깊을 대로 깊어진 2030의 남녀 갈등도 언젠가 해소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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