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탄과 굶주림, 전염병, 그리고 날씨. 캐나다의 스무 살 청년 윌리엄 크라이슬러가 74년 전 생면부지의 한반도 땅을 밟았을 때 중공군 못지않게 그를 위협했던 적들이다. 그는 서울을 점령하려고 남쪽으로 내려오는 중공군 6000여 명의 공세를 경기도 가평군에서 물리치라는 명령을 받은 캐나다군 450여 명 중에 하나였다.
전쟁터에서 ‘적과 맞서 싸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오직 겪어본 사람만 안다. 특히 6·25 전쟁은 미사일과 드론이 아닌 탱크와 소총으로 돌격하며 병사가 피를 쏟는 재래식 국제전이었다. 미군의 6·25 전쟁 참전 회고록을 모아놓은 웹사이트(thekwe.org)에 가보면 참전 용사들이 “우리가 치렀던 전쟁은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 따위는 비교도 안 되는 상상 초월의 잔혹한 악몽”이라거나 “살아서 지옥을 봤기 때문에 죽으면 천국에 가리라고 확신한다”고 회고하는 내용이 숱하다. 그러했던 전쟁이기에 캐나다군 기관총 사수 크라이슬러가 1951년 4월 23일부터 사흘간 ‘가평 전투’를 치르며 느꼈을 공포와 절망을 타인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그 사흘간 중공군은 나무 한 그루 없는 흙더미 민둥산을 개미 떼처럼 끝없이 기어올랐고, 총탄이 고갈된 캐나다군은 총검으로 저항했다. 총검 백병전은 사람끼리 눈을 마주 보고 뒹굴며 서로를 죽이는 일이다. 이마저 힘에 부친 캐나다군은 ‘팀킬’을 각오하고 아군 진지에 포 사격을 자청하는 전술까지 감행하며 버텼고, 끝내 4월 25일에 중공군을 기적처럼 격퇴시켰다. 이날 아침의 기진맥진한 캐나다군 풍경을 한 참전 용사가 ‘가평 방어전(Holding at Kap’ong)’이라는 제목의 회화로 그렸는데, “단 하루만이라도 더 살게 해달라고 신에게 빌었던 우리들”이라고 작품 해설을 달았다.
처절했던 사흘간의 사투를 운 좋게 외상 없이 끝낸 크라이슬러씨는 절뚝거리는 동료를 부축하면서 고지에서 내려왔다. 이 모습이 영국 전쟁박물관(Imperial War Museum) 소장 사진으로 남아있다. 사진 속 그는 카메라 렌즈를 일부러 피하는 기색이다. 지난해 봄 가평 전투 73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그를 만나 사진에 얽힌 이야기를 물어볼 기회가 있었다. 그는 “이런 사지(死地)에 있다는 걸 가족이 알면 안 된다는 생각과, 너무 추워서 옷을 이것저것 껴입었는데 상관이 보면 혼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린 것 같다”고 했다. 땅에 살기(殺氣)가 돌아서인지 4월인데도 방아쇠 누를 손가락까지 얼어붙게 하던 추위, 굶주린 아이들의 절규와 뭐든 파먹던 쥐 떼, 피와 오물의 냄새, 그리고 숨이 멎은 전우들의 얼굴. 아흔 넘은 노인이 됐어도 아물지 않은 기억들이라고 했다. 작년 말 별세한 그는 “한국에서 영면하고 싶다”고 유언을 남겼고, 최근 전우들이 있는 부산 UN기념공원에 안장됐다.
12·3 비상계엄 이후 국론 분열이 유례없는 지경으로 치닫자 정치권에선 ‘내전(內戰)’이라는 말을 만능 수식어처럼 서슴없이 쓰고 있다. 그러나 고(故) 윌리엄 크라이슬러씨의 유해 봉환 소식을 계기로 우리가 진짜로 경험했던 전쟁의 참상을 돌이켜보고, 이 시각 우크라이나와 가자 지구의 상황을 함께 떠올려보니 함부로 운운할 수 없는 내전이란 말의 무게를 느끼게 된다. 정치인이라면 소셜미디어 알고리즘에 올라타 동족 간의 혐오와 저주를 부추길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이 나라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차오르는 사회적 열기를 미래로 가는 엔진의 에너지원으로 전환시킬 설계도를 내놔야 마땅하다. 정치권의 무책임한 내전 타령이 하루빨리 멎기를 바라며,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불멸의 업적을 남긴 UN군 참전 용사들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