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1
오랜만이다. 나, 구씨. 어떻게 지내시나. 그동안 해방은 되셨나. 추앙해주는 여인은 만났고?
폭염에 웬 멍 짖는 소리? 아, 미안. 내가 요즘 우리 집 여자가 보는 이상한 드라마 때문에 열폭해서 헛소리가 다 나온다.
사과하려고. 재작년인가, 니 와이프가 미스터트롯, 아니 임영웅한테 빠져서 밥도 안 주고 서울서 부산까지 콘서트만 쫓아다닌다는 말에 헛웃음 터뜨렸던 거. 낙향한 선비마냥 오죽 꽉 막히게 살았으면 어부인이 스무 살 어린 총각에게 빠졌겠냐 훈계했던 게 민망해서, 소주 한잔 걸친 김에 용서를 구한다.
그러니까, 그게 남 일이 아니었다. 요즘 우리 집 여자가 딱 그짝이다. 구씨라고, 본명은 손석구. 그리 잘생긴 얼굴도 아니던데, 쌍거풀 없는 눈에 우수가 들어찼다나 뭐라나. 얼마 전엔 영화를 예매하라고 톡이 왔더라. 핏빛 범죄 영화라면 기겁을 하던 여자가 구씨가 나오니 꼭 봐야겠단다. 영화 절반은 눈 가리고 보길래 돈 아깝다 했더니 구씨 목소리 들은 것만으로도 본전은 뽑은 거란다. 배우들 무대 인사 한다고 장롱에 처박아둔 DSLR 카메라를 꺼내 기어이 극장으로 달려간 적도 있다. 근데 구씨를 코앞에서 만난 순간 셔터가 작동을 안 하더란다. 충전이 안 돼 있었던 거지. 그날 밤 카메라를 패대기치며 쏟아낸 악담은 너의 상상에 맡긴다.
진짜 기가 찬 건 따로 있다. 한번은 아침에 토마토 즙을 갈아 주길래 입맛이 없다고 하자 바닥에 쏟아버리더라. 하루는 나도 회식으로 늦고 딸도 친구들이랑 논다고 늦었는데 현관문을 잠그고 안 열어줘서 찜질방에서 자고 온 적도 있다. 장대비 쏟아지던 밤은 정말 섬뜩했지. 천둥 소리에 잠 깨 거실로 나갔더니 집사람이 어둠 속에 우두커니 앉아 있겠지. 잠이 안 온다고, 잠은 안 오고 계속 눈물만 난다면서.
그냥 지쳤대. 모든 관계가 노동이고, 눈 뜨고 있는 모든 시간이 노동이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자길 좋아하지 않는대. 오십 평생 사는 동안 자기는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고, 누군가로부터 진심으로 추앙받은 적이 없대. 애들 다 키웠으니 이제 좀 다르게 살아보고 싶은데 거울을 보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등신이 돼 있더래. 그래서 구씨가 좋대. 바람에 날아간 여자의 꽃모자를 주우러 죽을 힘 다해 도랑을 건너뛰는 구씨 같은 사람이면 다시 살 수 있을 것 같대. 납치해주면 기꺼이 따라가겠대, 낼모레 육십인 여자가. 이 정도면 중증 아니냐? 치솟는 물가에, 은행 이자에, 직장까지 뒤숭숭해서 나야말로 지구를 떠나고 싶은 사람인데 웬 구씨, 웬 추앙, 웬 해방이냐고.
#남자2
얘기 다 끝났냐? 뭔 투정이 장강의 용틀임처럼 장대하냐. 손석구? 3년 전엔 공유 아니었어? 지진희였나? 아무튼 그게 누구라도 넌 진심 고마워해야 한다. 그들이 니 와이프 인생의 빨간약이자 홍삼물이니. 진짜 중증은 그 누구에게도,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지. 북한군이 무서워한다는 중2도 갱년기 엄마한테는 무릎 꿇는다는 말 못 들어봤냐.
우선 칡즙부터 주문. 이소플라본 성분이 있어 여성 호르몬인 에스트로겐 역할을 한다. 석류는 씨앗까지 씹어 먹게 해라. 밀가루와 백미는 금물. 콩, 현미, 기타 잡곡이 하루도 빠짐없이 식탁에 올라야 한다. 여름엔 증세가 심해지니 더 각별히 신경 쓸 것. 작년에 나는 대게 3킬로 주문해서 쪄주고 까주고 빼주면서 임영웅의 ‘이젠 나만 믿어요’를 불렀다.
자식들에겐 엄마라고 언제나 너희를 위해 쓸 에너지가 남아도는 건 아니라고 말해줘라. 엄마도 사랑받아야 살 수 있는 여자임을 일깨워라. 그리고 환대하라. 너도 힘들다고? 나도 부장 승진에서 물먹은 시기였다. 근데 집사람이 웃으니 나도 웃게 되더라. 주가는 속절없이 떨어져도 다시 살고 싶어지더라. 내가 그녀를 의지하고 있더라.
쨍하면 햇빛 나듯 구겨진 것 하나 없는 삶이 어디 있냐. 비 오고 바람 불다 개기도 하는 게 인생이지. 시간 나면 그 드라마 같이 봐라. 날강도 같은 구씨가 여심을 어떻게 흔드는지 알게 되리니. “옆구리에 칼이 들어와도 꿈쩍 안 해. 근데 넌 날 쫄게 해.” “보고 싶었다 무진장. 주물러 터뜨려서 그냥 한입에 먹어버리고 싶었다.”
쫄지 말라구. 우리가 비록 늙은 톰 크루즈처럼 푸석해져간다만 순정 하나는 대한민국 탑건 아니냐. 너 아직 매력 있다. 아무렴, 구씨의 밋밋한 무쌍이 네 움푹한 쌍거풀에 비할쏘냐. 매미 가고 귀뚜라미 울면 진진에서 보자. 멘보샤에 고량주 한잔 하자. 너는 내가 추앙하고 환대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