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은 군사 훈련의 본질을 잘 알고 있었다. 2005년 7월 해병대 신병훈련소를 찾아 이렇게 말했다. “정치인들이 아무리 전략·전술을 열심히 꾸려놔도 군대가 뒷받침해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래서 여러분은 막강한 군대가 돼야 한다. 그래야 정치하는 사람이 외교를 하고 평화를 유지해나갈 수 있다. 전쟁이 없는 나라를 만들고 싶으면 더욱 열심히 훈련에 임해서 강한 군대를 만들어라.”
노 전 대통령은 아마 마키아벨리(1469~1527)를 읽었을 것이다. 이탈리아 정치사상가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평화 시에도 나태하지 않고 훈련을 지속, 운명이 변하더라도 거기에 맞설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한다”고 했다. “나는 대한민국 국군 통수권자로서 여러분에게 출정 명령을 하지 않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대한민국 국군이 없으면 그 일을 해낼 수 없다”던 노 전 대통령 연설과 맞물린다.
한미 연합 훈련이 지난 16일 시작했다. 컴퓨터 시뮬레이션 형식이다. 2018년 남북 정상회담 후 대규모 야외 실기동훈련(FTX)이 폐지됐다. 그나마 올해 훈련은 북한 김여정 협박 이후 참가 인원을 대폭 줄였다. ‘이런 식으론 동맹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우려가 나온다. 일각에선 ‘스마트 전장(戰場)’ 시대에 재래식 훈련은 필요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노 전 대통령과 마키아벨리라면 “헛소리”라고 말할 것이다. 가상 전쟁을 하는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도 밤을 새워가며 훈련한다.
최근 폐막한 도쿄 올림픽에서 여자 근대 5종 개인전을 인상 깊게 봤다. 선두를 달리던 독일 선수 아니카 슐로이(31)는 승마 경기에서 0점을 받아 31위로 떨어졌다. 무작위로 배정된 말[馬] ‘세인트보이’가 말[言]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나가지도 않고 점프도 거부하는 말 위에서 슐레이는 울었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 짧은 시간 말과 친밀해지는 법을 숱하게 훈련했겠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빨을 드러낸 말의 표정. 인간의 계획과 의지를 비웃는 우연의 광기(狂氣) 같았다.
한미 연합군의 ‘작전계획 5015’는 유사시 북한 핵심 시설 700곳 이상을 선제 타격하고 김정은 수뇌부를 무력화하는 계획이다. 국력을 총동원하는 전쟁 규모는 승마와 비교할 수도 없다. ‘세인트보이’ 같은 우연이 도처에서 속출할 것이다. 이런 돌발성을 미리 대비하는 것이 군사 훈련의 본질이다. 노 전 대통령은 1960년대 박정희 정권 시절 자신의 군 생활을 회고하며 “우리가 그렇게 박박 기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실감 안 나는 사회를 살고 있었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 연설은 유튜브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들이 꼭 한번 들어봤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