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의 영향력(Impact of the Small).”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IT 박람회 ‘CES 2025’에서 본 문구가 귀국한 뒤에도 계속 기억에 남아 있다. 올해 처음 CES에 참여한 일본 자동차 업체 스즈키의 구호였다. 부스에는 소형 트럭과 전기차 기술이 전시돼 있었고, 양산된 전기차는 없었다. 올해 첫 전기차 판매를 앞두고, 앞으로도 작고 가벼운 제품에 집중하며 ‘경차의 강자’ 자리를 지키겠다는 취지의 전시였다.

‘지각생의 변명’이란 걸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바로 옆엔 중국 전기차 업체 지커의 부스가 자리했다. 최근 전기차 수요 정체의 해결책으로 꼽히는 자동 충전 기술을 선보이고 있었다. 차 안에서 버튼 하나를 누르자 로봇 팔이 충전구를 찾아 자동 충전을 시작했다. 충전이 다 되면 충전기를 차에서 빼고, 일반 주차 구역으로 스스로 이동하는 것도 가능한 기술이었다. 전통을 강조하는 일본, 빠르게 변화하는 중국이 그곳에 있었다.

독자 기술로 세계 시장에서 이름을 떨쳐 온 일본차는 최근 이상 신호를 마주하고 있다. 일본 1위이자 세계 1위 기업 도요타는 작년 품질 인증 관련 부정행위가 적발돼 국내외에서 큰 질타를 받았다. 효율 위주 조직 문화 속에서 일정 단축 압박이 원인으로 지목됐다. 일본 2위와 3위인 혼다와 닛산은 수익성 악화로 인해 합병을 추진하고 있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전기차 분야 투자를 늘리는 가운데, 동남아·중국 등 주요 시장에서 중국 기업들의 파죽지세에 밀려난 영향이다.

도요타의 경영 철학이자 일본 기업들의 성장 동력을 상징해 온 ‘카이젠(改善·업무 혁신)’이 유효기간을 다해간다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매일 점진적으로 일의 효율성을 높이고 기술을 축적하는 방식만으로 생존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미국 테슬라가 배터리를 차체 아래에 탑재하는 방식을 통해 처음 전기차 시대를 열었고, 중국 기업들은 적극적인 기술 모방과 제휴를 통해 최근 전기차 선두 그룹까지 올라섰다. 다음 경쟁은 자율 주행이다. 미·중 기업들은 도로 위를 사람 없이 달리는 택시를 잇따라 내놓고 있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 기술을 선점하는 싸움이 기업들의 생존을 가르면서, 일의 속도 못지않게 방향을 정하는 일이 중요해졌다.

CES를 가득 채운 일본 업체들을 다시 떠올려 본다. 올해 미국·독일·한국 등 자동차 업체들이 대거 불참한 탓에 일본 업체가 돋보였다. 뒤늦게 전기차를 내겠다며 포부를 밝혔고, 자율 주행 등 미래 기술 대신 화려한 외관을 강조한 제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원점으로 돌아가겠다’(혼다) 같은 포부가 ‘지각생의 변명’일지 ‘초심자의 패기’일지는 두고 봐야 알겠다. 다만, 이 이야기가 동해 너머 섬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니란 것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