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나라 스웨덴 부부가 1960년대 후원하던 한국 소년에게 받은 편지를 평생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최근 기사로 썼다. 편지의 발신인은 어느새 퇴직 교사가 된 공삼현(66)씨였다. “친애하는 양친(養親)님께”로 시작하는 이 편지에는 “보내주신 4400원으로 학비를 내고 교복을 샀다” “앞으로 전교 1등을 하겠다”는 열 살짜리 소년의 감사 인사와 풋풋한 다짐이 담겨 있었다. 공씨가 쓴 수십 통의 편지를 스웨덴 할머니는 평생 간직했다.
영미권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이 편지의 존재를 알게 된 뒤 그를 수소문했다. 그가 장로로 있다는 교회를 통해 연락이 닿았다. “이 편지의 주인공이 장로님이세요?” 공씨는 1분간 말이 없었다. 이따금씩 “하윽” 하고 흐느끼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공씨는 ‘스웨덴 양친’을 까맣게 잊었다고 했다. “제가 이분들을 어떻게 잊고 지냈을까요.”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던 이 은퇴 교사는 기자에게 매일 전화를 걸어 스웨덴 양친에 대한 기억을 들려줬다.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속 스웨덴 부부의 기억, 양친에게 보냈던 자신의 스케치북 그림, 그들이 보내준 세계 동화 전집 덕분에 학급 문고가 생겨서 어깨가 으쓱했던 순간까지. 그는 양친과의 추억을 쏟아냈다.
지난 주말, 기자도 감사 편지 한 통을 썼다. 대학생이던 내게 생활비 장학금을 보내주신 교수님이 수신인이었다. 그 장학금 덕에 생활비가 없어 아르바이트와 근로장학생으로 정신없던 내가 주말만큼은 쉴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수년이 지난 지금에야 숨을 돌리고 감사하다는 편지를 쓸 수 있었던 것도 공씨 덕분이다.
왜 잊었을까 자책하는 공씨에게도 작은 핑계를 드리고 싶다. 판자촌에 누워 내일은 끼니를 챙길 수 있을지 고민하던 열 살짜리 꼬마, 꿈을 포기하고 실업계 학교에 진학해 돈을 벌어야겠다는 압박을 느낀 열여덟 소년, 그리고 평생 아이들을 가르치며 교사로 정년 퇴직한 그에게, “당신은 잊은 게 아닙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공씨는 지금 여러 구호 단체에 연락을 돌리며 잊고 지낸 양친의 유족을 찾고 있다. 그들의 후손이라도 만나 감사 인사를 전하겠다고 했다. 감사의 선순환을 다시 이어가기 위함이다.
도움 정도에 따라 크고 작은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모두에게도 ‘스웨덴 양친’ 같은 은인이 있을 것이다. 취업난에 힘겹게 일자리를 구하느라, 자녀의 분유 값을 벌기 위해 밤에는 대리 운전을 뛰느라, 갑작스레 노쇠해진 부모님을 간병하느라 빠듯한 삶을 살아가며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는 못했을지라도.
여러분의 ‘스웨덴 양친’은 안녕하십니까?
지금 머릿속에 스쳐가는 사람이 있다면, 뒤늦게라도 안부 문자 하나, 짧은 감사 편지 한 통을 보내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