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중반 미국 출장길에 TV 스포츠 뉴스를 켰더니, 막 끝난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어나더 사우스 코리안이 또 우승했다”고 전했다. 미 LPGA는 으레 ‘사우스 코리안’이 정상에 오르는 스포츠라는 아나운서 말투가 흥미로웠다. 지난 20여 년간 박세리와 세리 키즈가 만들어낸 한국 여자 골프의 전성시대는 신화(神話)다. 4년 전 방한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국회 연설에서 한국의 기적 같은 경제 발전을 언급하다 여자 골프 이야기를 꺼냈다. 그해 US여자오픈 1~4위가 전부 한국 선수였고 10위 이내 8명이 한국 선수였다. 세계 여자 골프계에서 ‘사우스 코리안’이란 이름은 미 PGA 투어의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와 동급이었다.
▶스테이시 루이스는 한때 미국 최고의 여자 골프 선수였다. 그런데 번번이 한국 선수에게 우승을 가로막혔다. 한국 선수에게 밀려 우승을 놓친 그는 인터뷰에서 “나는 이 정도 한국 선수 20여 명과 싸우고 있다”고 했다.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 미국의 넬리 코르다는 2년 전 한국 대회에 참가해 선두로 나섰다가 역전패했다. 그는 “한국 선수들은 어떻게 이렇게 어려운 코스에서 잘 치는 줄 모르겠다”고 했다.
▶한국 여자 골프는 호랑이 굴과 같다. 한국계가 아닌 선수가 한국에서 열린 KLPGA 투어 대회에서 우승한 것은 2005년 줄리 잉크스터(미국) 외에 거의 없다. 한국 기업이 후원해 10대 시절부터 한국 호랑이 굴을 경험한 코르다가 결국 세계 랭킹 1위에 오르고 올림픽 금메달까지 목에 걸었다.
▶지금은 세계 각국이 한국의 골프 유망주 육성 시스템을 배우고 있다. 일본은 한국의 국가대표 시스템을 벤치마킹하고 호주 출신 코치를 영입하면서 달라졌다. 제각각이던 일본 선수들 스윙이 간결하게 바뀌면서 황금 세대가 등장했다. 삼성이 박세리를 키운 것처럼 태국의 싱하 그룹은 유망주의 미국 유학비까지 내줬다. 그렇게 미국 대학에서 성장한 태국 선수들이 세계 무대에서 무섭게 올라오고 있다.
▶그제 여자 골프 마지막 메이저 대회 위민스 오픈에서 한국 선수는 10위 내에 아무도 들지 못했다. 올해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은 전무하다. 11년 만이다. LPGA 대회에서 한국 선수 우승도 크게 줄었다. 기대했던 올림픽에서도 모두 밀렸다. 코로나 사태로 한국 유망주들이 미국 진출을 꺼린다고 한다. 한국 투어도 매력적이어서, 미국 투어를 선망하던 시대도 아니다. 한국인이 골프에 특별히 뛰어날 까닭이 없다. 남들보다 열심히 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 남들도 다 열심히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