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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1945년 2월 19일 미 해병대가 일본 본토에 가까운 작은 섬 이오지마(硫黃島)에 상륙했다. ‘손바닥’만 한 이오지마 정도는 단숨에 점령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일본군은 섬 전체에 개미굴을 파고 미 해병대를 괴롭혔다. 일본군은 병사들에게 ‘미군 10명을 죽이기 전에는 죽지도 말라’고 명령했다. 첫날에만 미 해병대 2500여 명이 전사했다.

▶이오지마에 고지는 수리바치라는 산 하나밖에 없다. 2월 23일 미 해병 5사단 28연대의 한 소대가 수리바치산 정상에 성조기를 꽂으라는 명령을 받는다. 경사가 심해 손과 무릎으로 기어올랐다. 동굴 속 일본군이 튀어나와 공격했다. 마침내 오전 10시 반쯤 미군 6명이 성조기를 올리는 데 성공했다. 태평양 전쟁 중 일본 땅에 성조기가 처음 휘날리는 순간이었다. 산 아래서 싸우던 해병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감격의 파도가 상륙군 전체로 퍼져 나갔다.

▶이 장면을 해병대 하사가 찍었고, AP통신 기자가 3~4시간 뒤 그 순간을 재연해 다시 찍었다. 미군은 이것으로 고비를 넘었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전투는 한 달이나 더 이어졌다. 결국 미군 6800여 명, 일본군은 2만명 가까이 죽고 전투가 끝났다. 수리바치 정상에 성조기를 세운 해병 6명 중 3명도 전사했다.

▶AP통신의 ‘이오지마 성조기’ 사진은 미국 모든 신문의 1면을 장식했다. 전 미국에 애국심의 파도를 일으켰다. 미 정부는 생존한 ‘성조기 해병’ 3명을 내세워 전쟁 채권을 팔았다. 그 3명 중 한 명이 미국 원주민(인디언) 출신 헤이스 상병이었다. 성조기 사진의 맨 왼쪽이다. 그는 인종 차별을 극복하려고 원주민어 대신 영어를 썼고 해병대에 자원 입대했다. 2차 대전에 뛰어든 미 원주민이 4만4000여 명이나 된다. 나바호족 등은 암호병으로 큰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일본·독일이 그들의 언어를 해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최근 미 국방부 홈페이지에서 ‘이오지마 성조기’ 사진이 돌연 삭제됐다. 미 해병대의 상징이자, 미군 고난 극복의 상징이 없어진 것이다. 트럼프가 ‘다양성’ 정책을 폐기하고 있는데 성조기 사진 속 원주민 헤이스 상병을 문제 삼은 것으로 알려졌다. 원주민 병사 소개와 그의 사진도 함께 사라졌다. 나바호족의 암호병 활약상도 삭제됐다.

▶트럼프는 취임 직후 미 역사상 두 번째 흑인 합참의장을 전격 경질했다. 다양성 폐기라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실제는 백인 우월주의에 기반을 둔 인종 차별로 보인다. 이를 미국 장군들까지 눈감고 침묵하고 있다. 미국이 낯설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