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고스의 화가, 조약돌 투표, 기원전 490년경, 테라코타, 지름 31cm, 로스앤젤레스 J. 폴 게티 미술관 소장.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다. 선거를 분석하는 학문을 ‘시폴로지(psephology)’라고 하는데 이는 그리스어로 조약돌을 뜻하는 ‘프세포스(psephos)’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선거와 민주주의가 시작된 고대 그리스에서 조약돌로 투표를 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문화와 정치의 황금 시대에 활동했던 도공(陶工) 브리고스가 만든 크고 둥근 와인 잔 겉면에는 양쪽으로 나뉜 투표함에 조약돌을 넣는 이들이 보인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묘사된 한 장면인데, 이는 이름을 알 수 없으나 브리고스 도기의 그림을 도맡았던 ‘브리고스의 화가’ 작품이다.
트로이 전쟁의 두 영웅 오디세우스와 아이아스는 아킬레우스가 파리스의 화살에 맞아 죽은 뒤, 달려드는 트로이군을 함께 물리치고 그의 시신을 그리스 진영으로 옮겼다. 아킬레우스의 장례식에서 시신을 지킨 공로가 가장 큰 이에게 유품인 갑옷을 주기로 하고 투표를 했는데, 뛰어난 언변으로 청중을 감동시킨 오디세우스가 많은 표를 얻었다. 그림의 오른쪽 끝, 조약돌을 어림해보며 이마를 짚고 고뇌하는 인물이 바로 패배를 예감한 아이아스다. 와인 잔 안쪽에는 아이아스의 시신이 그려져 있다.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던 아이아스는 광기에 눈이 멀어 밤새 양 떼를 도살해놓고 그리스군을 죽였다고 착각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아이아스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자기 칼에 엎어져 목숨을 끊었다.
1953년 미국 CIA는 영국과 공모하여 이란에서 쿠데타를 일으키고, 총선으로 정권을 잡은 모사데크 총리를 몰아냈다. 그때 작전명이 ‘아이아스 작전’이었다. 목숨을 바쳐 명예를 지킨 아이아스가 지하에서 얼마나 억울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