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코믹스는 등장인물 히어로가 수십 명이 나오는 ‘어벤져스 엔드게임’으로 역대 최대 흥행작을 만들었다. 관객들은 다양한 능력과 단점을 가진 히어로들이 문제를 겪으면서 성장하고 힘을 합쳐서 악당을 물리치는 스토리에 열광했다. 반면 DC코믹스는 이를 흉내 내서 여섯 명이 나오는 ‘저스티스 리그’를 만들었지만 실패했다. 이유는 악당을 수퍼맨 혼자 다 해치우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이 시대는 혼자 다 하는 단조로운 시대가 아니다. 다양한 요소가 조화를 이루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 다양성 추구는 인간의 본능일 것이다. 우리는 보통 나와 반대되는 성향의 이성에게 매력을 느낀다. 다양한 유전자의 융합으로 만들어진 후손이 더 강한 생존력과 면역 체계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불규칙 정도를 말하는 프랙털 지수라는 것이 있다. 하얀 종이같이 완전한 규칙의 상태를 프랙털 지수 1로 본다. 그 위에 검은 볼펜으로 낙서를 하기 시작하면 점점 불규칙성이 늘어나면서 프랙털 지수가 커진다. 낙서가 심해져 완전히 검은 바탕으로 되면 프랙털 지수는 2가 된다. 인간이 아름다움을 느끼는 수준은 프랙털 지수 1.4 수준이라고 한다. 완전한 규칙도 아니고 완전한 불규칙도 아닌 적당한 불규칙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숲은 나뭇가지의 모양이 제각각이다. 하지만 모든 나뭇가지는 위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규칙이 있고 나뭇잎은 모양은 달라도 색상은 녹색으로 통일되어있다. 불규칙 속에 전체를 아우르는 규칙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을 아름답다고 느낀다.
다양성이 답이다
두 사진이 있다. 하나는 서울 강북에서 강남을 바라본 강변 풍경이다. 똑같은 모습의 12층짜리 아파트가 수㎞에 걸쳐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다른 사진은 뉴저지에서 허드슨강 건너편에 있는 뉴욕을 바라본 풍경이다. 각기 다른 높이와 모양의 빌딩들이 조화를 이루고 제각각 서 있다. 뉴욕의 풍경을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관광객들이 온다. 맨해튼의 강변 풍경이 멋있는 이유는 다양성이 만드는 적절한 불규칙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대부분 빌딩이 세로로 긴 수직형 건물이라는 통일성은 있지만 그 안에서 모양과 색상이 적절하게 다양하다. 반면 잠실 아파트 단지가 아름답지 않은 이유는 한 설계 사무소가 수천 가구 아파트 단지를 설계했기 때문이다. 높이도 천편일률적이다. 12층이 제한이면 12층으로, 35층이 제한이면 모두 35층으로 짓는다. 지루하고 아름답지 않을 수밖에 없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아파트는 높이도 다양하고 저층형은 저층대로의 특색이 있고 고층은 고층만의 장점이 있는 디자인의 다양성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몇 년 전 주요 건설사 아파트 평면도를 새롭게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한 적이 있다. 이때 새롭게 만든 평면도와 기존 평면도의 선호도를 조사하는 설문조사를 했다. 새로운 평면도는 49%의 지지를 받았고, 기존 평면도는 51%의 지지를 받았다. 나 같은 경영자였다면 49%의 소비자를 위한 블루오션으로 뛰어들었을 것이다. 49%의 소비자가 원하지만 시장에는 그런 제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건설사 임원은 분양 위험성을 낮추기 위해서 51%의 평면도를 선호했다. 이것이 우리의 아파트가 점점 더 비슷해져 가는 이유다. 공급자 규모가 대형화되고 종류가 적어지면 주거 형태도 단순해진다.
획일화가 만든 가치관 정량화
우리나라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점 중 하나는 이 같은 ‘획일화’에 있다. 가장 큰 이유는 근대화를 빠르게 하는 과정에서 표준화와 대량생산을 했기 때문이다. 교육부와 LH가 주체가 되어서 전 세계 어디보다도 효과적으로 교육과 주거의 질을 높였다. 그런데 빠른 발전 뒤에는 부작용도 있는 법이다. 전국 어디나 강남과 비슷한 도시에 똑같은 아파트가 양산되었다. 자신만의 독특한 가치를 가지지 못하다 보니 국민 모두 오리지널인 서울 강남 아파트에 살고 싶어 한다. 획일화가 지속되면 가치관이 정량화된다. 모든 것이 비슷하기 때문에 차이를 구별할 방법은 성적, 연봉, 키, 체중 같은 정량화된 지표만 남는다. 아파트 평수, 내 집 가격이 어느 나라보다 중요한 나라가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집값은 중요하다. 하지만 문제는 가격 이외에 별다른 가치 차별이 없다는 점이다. 단순해진 주거 형태는 주택의 가치가 정량화되는 것을 가속화한다. 그렇게 동일화된 아파트 평면도는 화폐의 기능을 가지게 되었다.
앞으로 우리 도시는 각기 다른 차별화된 가치를 만드는 데 주력해야 한다. 지방은 서울과는 다른 차별화된 라이프 스타일을 제공할 수 있는 도시를, 같은 도시 안에도 지역마다 다른 분위기를, 같은 아파트 단지 내 같은 평형대에도 다양한 평면도와 공간이 만들어져야 한다. 다양성 증진을 위해서 재건축 재개발 시 마스터플랜은 한 회사가 하더라도 세부적인 디자인 발전은 여러 프로젝트로 나누어서 다른 건축설계사무소가 진행하면 좋을 것이다. 비용 증가 문제는 민간 기업끼리 경쟁을 통해서 가격을 낮추고 행정 절차 간소화로 금융 비용을 줄이면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다양성의 도시는 어느 지역에 살든지 자신의 공동체에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도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