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경, '번역 시리즈', 2011년, 비누와 향료 등, 런던 헌치오브베니슨 갤러리 전시장면, 신미경 제공.

긴 여정을 마치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목재 크레이트 여럿을 전시실에 부렸다. 각각을 열 때마다 귀한 도자기가 하나씩 모습을 드러낸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오채도자, 꿀을 바른 듯 반짝이는 법랑채, 단정하고도 고급스러운 청화백자가 눈을 유혹한다. 런던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조각가 신미경(54)의 ‘번역 시리즈’다. 신미경은 이 모든 ‘도자기’를 비누로 만들었다.

번역은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일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문화권의 두 언어가 완전히 호환될 리 없다. 한국에서 미술대학을 나오고 영국에서 유학한 작가가 미술뿐 아니라 생활의 모든 면에서 느꼈던 감정은 번역이 제대로 안 되는데도 어쩔 수 없이 다른 언어를 빌려야 하는 수많은 존재에 대한 애처로움 같은 것이었다. 비너스상을 눈을 감고도 그릴 만큼 모사하고 또 해야 했던 한국의 미술 교육 과정을 거친 작가 자신이나, 유럽 미술관 진열장에 들어있는 중국 도자기, 영국 박물관이 자랑하는 그리스 신전의 대리석 조각이 모두 마찬가지로 원래의 장소에서 멀리 떨어져 나와 제 기능을 온전히 하지 않는 불완전한 존재들이었다. 신미경은 대리석이나 도자기처럼 견고한 작품들을 쉽게 녹아 사라지는 무르고 연약한 비누로 애써 ‘번역’하면서 이들을 최대한 완벽하게 재현했다. 그러면서도 취급주의 스탬프와 출도착지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은 나무 상자들은 이 작품들이 현재 놓여 있는 이곳에 원래부터 있던 게 아니라는 사실을 강변한다.

신미경의 작품은 사진으로는 전달되지 않는 향을 내뿜는다. 매 순간 휘발되는 이 작품들은 말하자면 적극적으로 시간을 달려 사라지는 중이다. 사라지는 모든 것들은 서글프지만, 이처럼 유난히 아름답고 눈부신 무언가가 영원하지 않다니 더욱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