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 푸생, 성요한이 있는 파트모스섬 풍경, 1640년, 캔버스에 유채, 100.3×136.4㎝,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소장.

금빛 후광을 두른 노인이 바닥에 앉아 글쓰기에 몰두하고 있다. 성(聖) 요한이다. 등 뒤에 무심히 선 독수리가 바로 그의 상징이다. 그 주위로 무너져 내린 석조 건물 잔해가 나뒹구는 가운데 푸르른 나무가 무성한 걸 보니 한때 융성했던 도시가 멸망하고도 오랜 세월이 흐른 모양이다. 멀리 바다가 보이는 이곳은 파트모스섬이다. 예수의 12사도 중 하나였던 성 요한은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의 박해를 받아 여기로 추방당했다가 나팔 소리 같은 신의 음성을 듣고 요한계시록을 썼다고 알려져 있다. 요한계시록은 온갖 환상적 상징을 통해 종말과 심판을 예견한 신약성서의 마지막 책이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종말을 상상하기에는 지나치게 평온한 풍광 아닌가.

실제로 로마제국 시대에 종교인과 정치범의 유배지였다는 파트모스섬은 사실은 바위로 뒤덮인 작고 황량한 섬이다. 그러나 화가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1594~1665)은 파트모스섬을 이처럼 온화한 기후 속에서 자연과 건축이 단정하게 어우러진 전원 풍경으로 그려냈다. 푸생은 프랑스인이었지만 잠시 루이 13세의 왕실 화가로 지낸 시간을 빼고는 삶의 대부분을 로마에서 보냈다. 그는 고대 로마의 웅장한 건축과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걸작들에서 영감을 받아 질서 정연하고 조화로우며 논리적으로 공간을 구성하는 고전적 바로크 양식을 완성했다.

푸생은 역사 인식이 투철한 이지적 화가였다. 그의 시대에 로마는 기독교 세계의 중심지였으니, 그의 눈앞에 펼쳐진 옛 로마의 유적들은 바로 이교도들에게 닥친 종말과 기독교의 승리를 상징했다. 영화롭던 제국의 고요한 폐허는 종말을 상상하기에 딱 좋은 장소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