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눈매, 우뚝한 코, 단정한 입술을 가진 순백의 얼굴 뒤로 곱슬머리를 느슨하게 묶은 이 여신의 옆모습을 40대 이상 한국인이 본다면 틀림없이 머릿속에서 ‘사랑의 비너스’라는 광고 음악이 울려 퍼질 것이다. 유명 여성 속옷 브랜드 로고의 바탕이 된 ‘밀로의 비너스’는 루브르 박물관이 자랑하는 대표적 그리스 조각으로 기원전 100년을 전후로 만들어졌다. 말하자면 2000년 전 먼 나라의 여신상이 우리나라에서 미녀의 표본이자, 미대 입시를 향한 필수 관문인 석고 데생의 단골 소재로 통용되며 일상에 깊이 들어와 있는 셈이다.

데비 한, 미의 조건 IV, 2007~2010년, 백자, 각 56×25×28㎝, 미술가 제공.

그토록 익숙한 여신의 두상이 여럿 모였는데 얼굴이 영 낯설다. 매부리코, 실눈, 처진 눈, 두툼한 입술, 얇은 입술, 튀어나온 턱이 제각각인 이 상들은 미술가 데비 한(Debbie Han·1969~)이 백자(白磁)로 만든 조각이다. 따지고 보면 실제 비너스의 이목구비보다 훨씬 흔한 인상인 데다, 서양의 대리석보다는 조선 백자가 우리에게 더 가까운 전통 문물인데도 왜 이 작품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지는 걸까.

한국에서 태어난 데비 한은 어릴 때 부모와 미국으로 이민해서 미술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미술가로 입지를 굳힌 뒤 한국을 방문했다. 고국에서 작가 눈에 비친 비너스의 존재감은 낯설고도 어색했다. 서구에서는 이미 철 지난 고전 미술이 예술의 절대적 기준이 되고, 서양 미녀의 이목구비를 따라 얼굴을 고치는 게 유행하는 한국 현실을 작품으로 되짚어 보고자 했다. 데비 한은 청자와 백자, 나전칠기 등 전통 기법을 익혀 여러 인종의 특징을 모두 담은 새로운 비너스들을 만들어냈다. 완전히 한국적이지도, 서양적이지도 않은 개성 다양한 여인들이 바로 작가가 마주치는 현실의 인물들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