쨍한 초록과 눈 시리게 새빨간 플라스틱 소쿠리 5376개를 엮어서 미술관 천장에 매달았다. 제목 ‘카발라’는 유대교 신비주의 사상이다. 그 심오한 뜻은 모르나, 어느 집에 가도 틀림없이 하나쯤 굴러다닐 소쿠리가 모이고 쌓여 3층 높이 공간을 압도하는 이토록 거대하고 찬란한 미술품이 되다니 신비롭다.
1990년대 초부터 전 세계를 누비며 활동해 온 미술가 최정화(61)는 줄곧 이처럼 촌스럽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싸구려 플라스틱 제품을 아찔하게 쌓거나 잡다하게 벌여둔다. 지금은 플라스틱이 환경오염의 주범으로 지탄받고 있으나, 사실 19세기 말 플라스틱은 당구공 제조에 필요한 상아를 대체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개발됐다. 말하자면 플라스틱은 당구공이 될뻔한 코끼리를 숱하게 살려낸 친환경 재료이자, 누구나 저렴하게 당구를 즐길 수 있게 만든 민주적 물질이다.
최정화는 미술대학을 나왔으나 진짜 학교는 시장이라고 했다. 최소한의 공간에 물건을 최대한 모아두고, 한 푼이라도 더 싸게, 한 개라도 더 팔아야 생존하는 원초적 시장의 세계에서 그는 놀라운 생명력과 창의력을 느끼고 배웠다. 값싼 원재료를 대량으로 들여다가 빨리빨리 대충대충 찍어내면, 값도 싸고 번드르르하면서 잘 썩지도 닳지도 않는 플라스틱이라는 신통한 물질 자체가 가성비를 신봉하는 시장의 생리와 닮았다. 그런데 최정화의 작품을 보면 볼수록 잘살아 보겠다는 순수한 욕망으로 남들보다 빠르게, 남들보다 많이, 남들보다 치열하게 질주했던 지난 세기의 한국인이 보인다. 하찮은 플라스틱 소쿠리 수천 개를 하나씩 엮어 눈부신 ‘카발라’가 됐듯이, 전쟁의 잿더미에서 수십 년 만에 놀라운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도 ‘카발라’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