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전위적 미술가라면 어떨까. 스위스 작가 하이디 부허((Heidi Bucher·1926~1993)와 남편이자 동료 카를 부허의 두 아들 인디고와 메이요의 마음에 뚜렷이 남은 기억은 집을 떠나 캐나다와 미국으로 온 가족이 함께 옮겨 다닌 시절이다. 그들은 작업으로 바빴던 엄마 옆에서 스티로폼 같은 특이한 작품 재료들을 갖고 놀았고, 그렇게 다 같이 신나게 논 과정은 모두 작품이 됐다. 사진은 1972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인디고, 메이요, 하이디(사진 왼쪽)가 스티로폼 위에 자개 가루를 발라 만든 ‘입는 조각’ ‘바디 래핑’을 다 같이 입고 찍은 것이다.

인디고, 메이요와 함께 몸을 감싼 하이디 부허, 미국 캘리포니아 샌타바버라와 할리우드 힐스에서, 1972, 사진 제공 하이디 부허 에스테이트.

취리히 응용 미술 학교에서 섬유 디자인을 배우며 바우하우스식 조형 교육을 받은 하이디는 결혼 후 취리히 전위 미술계에서 부부 미술가로 함께 활동했지만, 아이들을 낳은 뒤로는 미술에서 멀어졌다. 스위스는 1971년에야 여성 참정권을 부여할 정도로 가부장적 사회였지만, 당시 여성 해방 운동이 절정에 달했던 미 캘리포니아는 신세계였다. 그녀는 거기서 크고 무겁고 단단한 조각이 아니라, 부드럽고 가벼워서 입고 돌아다닐 수 있는 조형물을 만들면서 작가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었다. 옷이란 몸을 보호해주지만 동시에 입고 있는 동안 입는 이의 행동과 위치를 통제하는 사회적 도구이기도 하다. 하이디는 한 번도 옷의 재료였던 적이 없는 스티로폼으로 고치 같은 옷을 만들어 입고 춤을 추며 마치 고치에서 태어나는 나비처럼 전통적 사회의 구속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지난 3월 아트선재센터에서 작가의 회고전을 열면서 당시의 ‘바디 래핑’을 재제작했다. 환갑이 넘은 인디고는 수십 년 만에 똑같이 되돌아온 엄마의 조각을 입으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