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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이 많다. 나를 모르는 자가 집에 온다면 허영 많은 단역 배우 집이라 생각할 것이다. 옷을 좋아해 어린 시절에도 깔롱쟁이라는 말을 들었다. 깔롱쟁이는 멋쟁이의 경상도 방언이다. 꼭 좋은 의미로만 쓰이는 것 같지는 않다.

가장 많은 건 가을옷이다. 옷은 역시 가을옷이다. 얇지도 두껍지도 않아 디자인도 다양하다. 특히 나는 잠바가 많다. 점퍼의 일본식 표현이다. 의외로 표준어다. 나는 아직도 겨울옷은 돕바라 부른다. 토퍼의 일본식 표현이다. 순화해 말해야 옳다. 잠바, 돕바라 불러야 어쩐지 기분이 산다. 역시 옛날 사람이다.

얼마 전 금천패션영화제에 일하러 갔다. 패션 단편을 상영하는 영화제다. 구로공단이 있던 패션 특화 지역 금천구 주최로 열린다. 걱정 한마디 하자면, 정부 문화 예산 삭감으로 많은 지역 영화제는 존폐 위기다. 금천패션영화제 계속 여부는 지원사 마리오아울렛 경영 실적에 달려 있을 것이다.

영화제 행사를 진행하기 직전 거울을 봤다. 작년까지 나는 잠바를 입고 참가했다. 올해는 반팔에 반바지였다. 여름이 길어졌다. 너무 길어졌다. 가을 잠바는 쓸모없는 옷이 되어간다. 잠바 입으려면 곧 돕바를 꺼내야 할 것이다. 기후변화는 깔롱쟁이의 적이다.

지금 나는 부산국제영화제 출장을 위한 짐을 싸는 중이다. 내일 서울 기온은 10도까지 떨어진단다. 가을 재킷을 입으려던 계획은 수정했다. 겨울 코트를 꺼내야 한다. 무슨 코트를 입을지 고민하다 테스 형 말처럼 나 자신을 알기로 했다. 영화 평론가 따위가 행사에서 무슨 옷을 입었는지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가을은 없다. 그걸 인정해야 한다. 순식간에 영하 18도 겨울이 될 것이다. ‘가을 멋쟁이의 시절은 끝났다’고 우는 깔롱쟁이들이 당근마켓에 저렴하게 올리는 트렌치코트를 사고 싶다면 지금이 적기다. 가을옷은 쓸모없다 하지 않았냐고? 옷을 꼭 입으려고 사는 건 아니지 않은가? 반론은 책을 반드시 읽으려고만 사는 독자에게만 허락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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