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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이'의 김태리. /tvN

“때는 1950년대 전쟁 직후 여성 국극(國劇)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 소녀들은 왕자가 되기를 꿈꾼다.”

시청률 16.5%로 종영한 인기 드라마 ‘정년이’는 1950년대를 풍미했던 여성 국극이 배경이다. 여성 국극은 극중 모든 배역을 여성들이 맡았던 창극이다. 소리·춤·연기에 화려한 무대 장치까지 곁들여서 ‘오빠 부대’를 몰고 다닐 만큼 선풍적 인기를 누렸다. 요즘 아이돌 스타의 원조에 해당하는 셈이다.

‘정년이’는 2019~2022년 웹툰으로 먼저 연재됐다. 지난해 창극으로도 공연됐다. 웹툰과 창극의 인기가 이번엔 안방 드라마로 번진 셈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정년이’는 이상한 드라마다. 없는 것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절대적인 선악 구분이 없다. 음악 영화나 드라마의 기본 공식 가운데 하나가 천재와 범인(凡人)의 대립 구도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음모설에 바탕한 영화 ‘아마데우스’나 괴팍한 지휘자 강 마에(김명민)를 등장시킨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가 모두 그랬다.

그런데 ‘정년이’에는 이런 이분법이 없다. 물론 국극단 내부에는 치열한 경쟁이 존재하고 몰래 소품을 망가뜨리는 시기와 질투, 냉대와 괄시도 있다. 하지만 한정된 배역을 차지하기 위한 정정당당한 승부가 사소한 음모들을 주변으로 밀어낸다. 국극단의 대스타인 ‘문옥경’(정은채)은 신입들에게도 “많이 보고 배워서 쑥쑥 커라. 내 자리를 위협할 정도로 빨리 커라”라는 덕담을 건넨다. 라이벌이 곤경에 빠지면 도리어 구해주고, 앙숙과도 기꺼이 한 팀을 이룬다. 주역이든 단역이든 서로에게 기꺼이 배우려고 한다.

또한 과거 한국 드라마에서 빠지지 않았던 연애가 없다. 여성 국극의 동성애적 색채는 과감하게 탈색시킨 대신에, 여성들의 우애와 연대를 일컫는 자매애(姉妹愛)로 대체했다. 여성 국극의 장르 특성과 어울리는 여성 서사를 지향했다는 점도 최근 트렌드와 잘 맞는다.

마지막으로 한(恨)의 정서도 없다. 30여 년 전까지도 영화 ‘서편제’에서 절절하게 묘사했던 구슬픈 한은 국악의 상징처럼 인식됐다. 하지만 ‘정년이’에서는 눈물 흘리는 주인공의 모습조차 드물다. 오히려 한 편의 ‘오디션 프로그램’처럼 치열하게 경쟁하고 노력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시종일관 두드러진다. 그런 의미에서 드라마의 국극단은 오늘날의 엔터테인먼트 회사이며, 연구생들은 연습생에 가깝다. 주인공 개인만이 아니라 집단적인 성장극인 셈이다. 어쩌면 시간의 흐름에 수반되는 감수성의 변화야말로 ‘정년이’의 가장 큰 성과일지도 모른다. 하나의 이야기를 웹툰·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로 활용하는 ‘원 소스 멀티 유스(one source multi-use)’는 한국 문화 산업의 마지막 숙제였다. 드라마 ‘정년이’가 그 과제를 해내고 있다. 역시 정답은 멀리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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