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대지와 그 위를 덮은 하늘이 공허하다. 해와 달이 있으나 어둡고 침울한데, 빛이 있어도 밝힐 세상이 없고, 온기가 있어도 키울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15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제작된 기도서 ‘주님의 포도원서’는 두 권으로 이루어졌는데 현재 프랑스 그르노블 도서관에 있는 첫 번째 책에는 예수의 육화와 수난에서 부활로 이어지는 구원의 과정이 담겼고, 영국 옥스퍼드 대학 보들리언 도서관 소장본인 두 번째 책에는 그리스도의 적들이 세상을 활보하고 마침내 종말이 오고, 종말 이후에 최후의 심판이 도래해 천국과 지옥을 목도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중세 말, 유럽에서는 종말론이 횡행했다. 인구의 거의 절반을 앗아간 흑사병이 잦아든 다음, 1453년에 막을 내릴 때까지 장장 116년이라는 세월 동안 백년전쟁이 이어지며 군사분쟁이 끊이지 않았으니, 누구라도 말세라 한탄하며 힘겹게 살았을 것이다. 이 책은 종말을 예견하는 여러 징조와 최후의 심판, 그리고 죄지은 자들이 지옥에서 받는 고문과 정의로운 이들이 천국에서 누리는 축복을 여러 페이지에 걸친 생생한 그림으로 보여준다. 어두운 태양과 빛이 없는 달은 성경의 요한계시록과 마태복음에서 언급됐지만, 이 책은 성경에서 유래한 종말의 상징뿐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 그레고리우스 등 교부들의 여러 저술에서 따온 다양한 내용을 총망라한 것이다.
이 책의 주인은 아마도 이토록 황량한 해와 달을 보며 다가올 종말을 대비해 쉬지 않고 회개하고 신의 축복을 기도했던 고귀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 험난한 세상에서 하루하루 고통받던 평범한 이들은 이 고통이 어디서 와서 언제 끝날지조차 모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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