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ncel
Cancel
live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진짜 서로 좋아서 한 거였거든요? 근데 강제로 했다는 거예요!”

“저런, 보통 이런 사건의 경우 둘만 있는 상황이라 증거가 없다 보니..”

“증거 있어요. 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녹음해 놨거든요!”

요즘 데이트 트렌드는 ‘녹음’이다. 2018년 대법원의 ‘성인지 감수성’ 판결은, 긍정적인 여파와 부정적인 여파를 동시에 가져왔다. 정황상 명백한데도 물증이 없어 강간범을 고소하지 못하는 억울한 성범죄 피해자들이 줄어들었지만, 일부 남성은 언제 어디서든 성범죄자로 몰릴 수 있다는 공포에 떨면서 녹음기를 켜게 되었다.

사실 성인지 감수성 판결은 피해자의 진술만 가지고 유죄 판결을 내릴 수 있다는 식의 우격다짐 판결이 아니다. 간접 증거와 정황 증거에 부합하는 범죄 피해자의 일관되고 신빙성 있는 진술은 유죄의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있고,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강요해서는 안 되며, 사후 정황이 전형적인 피해자의 행동 패턴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진정한 취지다.

그러나 그 논리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별로 없다. 게다가 처벌까지 안 받는다 하더라도 성범죄로 고소당해 수사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일이다 보니, 어떻게 하면 고소 ‘까방권’을 획득할지 고민하는 것이다. 성범죄 전문 변호사인 어떤 친구는, 아들이 성인이 되면 ‘데이트 동의서’, ‘스킨십 동의서’, ‘성관계 동의서’를 단계별로 작성해서 태블릿에 넣어줄 거라고 말한다. 여자 친구를 만나면서 진도(?)를 뺄 때마다 일일이 전자서명을 받게 하겠다는 것이다.

‘증거 수집’의 중요성을 체감하는 건 남성들뿐만이 아니다. 여성들은 누군가를 만나러 가기 전부터, 아니, 약속이 잡히기 전부터 쉴 새 없이 불안해한다. 소개팅을 하기로 한 이 사람이 정상적인 사람이 맞는지, 어두운 곳에 둘만 남겨졌다가 돌변하진 않을지, 데이트 장소와 시간대도 신중히 골라야 한다.

오해를 불러올지도 모르는 상황이라면, 자신의 거부 의사를 딱 부러지게, 반복적으로 표현하고 그걸 증거로 남겨 놓아야 한다. 날씨가 너무 춥고 술집은 다 문을 닫았으니 모텔에 가서 술만 먹자는 회사 선배의, 대학 동기의, 동창의 말에 ‘성관계 거부 의사’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밝혔다는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혐의 통지서를 받아 들고 무너지는 피해자를 많이 봤다.

요즘 성범죄 피해자들은 스스로 가해자에게 연락하기도 한다. ‘사과받으면 증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해자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해 자백을 받아내려는 피해자와, 자칫하면 고소당하겠다는 생각에 적당히 사과는 하되 구체적인 자백은 하지 않는 가해자의 마라톤 녹취를 듣고 있다 보면, 정말 전자 서명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혹자는 이게 맞다고 말한다. 과거에는 성 인식이 형편없었다고. 안돼안돼돼돼가 아니라 NO는 NO이고, 나무를 열 번 찍으면 스토킹으로 처벌받아야 하며, 90년대 드라마에 나오는 ‘벽치기’는 강제추행이라고. 혹자는 연애하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고 말한다.

로맨틱한 스킨십을 나눈 저 상대가 갑자기 돌변해 날 고소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내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 칼을 들고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그래서 모든 걸 녹음하고 녹화하기 시작하면, 어떻게 사랑이라는 감정이 끼어들 수 있겠냐고. 사랑과 법은 과연 공존할 수 있을까? 책상에 쌓여가는 고소장을 바라보며,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을 던져본다.


△매일 조선일보에 실린 칼럼 5개가 담긴 뉴스레터를 받아보세요. 세상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91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