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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음식을 몰래 차 트렁크에 잔뜩 실어 보낸 엄마 때문에 속상하다는 후배의 말을 들었다. 쉰 나물과 반찬을 버리다 한탄 섞인 한숨이 난 건, 이 일이 매년 반복됐기 때문이다. 귀한 음식을 아깝게 다 버리게 된다고 아무리 말해도 “나 같은 엄마가 어딨냐!”며 주고 싶은 건 꼭 줘야 하는 엄마가 점점 버겁다는 것이다. 이런 갈등은 꽤 흔하다. 관심과 걱정이 틀림없는 이 사랑을 그녀는 왜 부담과 생색으로 느낄까. 어째서 세상 부모들의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는 종종 ‘남들 보기 부끄럽지 않게!’란 말로 오염돼 자식을 옥죌까.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는 경우가 더 많다. 안타깝게도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은 더 그렇다. 내가 필요하다고 믿고 생각하는 사랑을 주느라, 정작 자식이 원하는 게 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가족 상담 프로그램에 나와 “살면서 부모님의 사랑을 느낀 적이 한 번도 없다!”고 절망하는 자식과 “너 하나만을 위한 삶!”이라고 억울해하는 부모 사이의 간격은 그렇게 생긴다.

사랑이 힘든 건 우리의 본질적 결핍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 말투는 아이의 것으로 급격히 퇴행한다. 연인 귀에 “나 예뻐?”를 수시로 묻고, “그냥 너라서 다 예뻐!”란 말에 안도하는 식이다. 중요한 건 조건 없이 사랑한다는 일관된 행동과 메시지다. 기억할 건 ‘사랑해’라는 내용보다 그것을 상대에게 전달하는 말투, 눈빛, 몸짓인 형식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가족은 끝없는 오해와 이해, 그리고 화해로 지탱된다.

팔꿈치를 데었을 때라야 우리는 그것이 거기에 존재했음을 느낀다. 사랑은 온 존재를 데는 것이다. 그래서 사소한 것에 뛸 듯이 기쁘고, 별것 아닌 것에 절망하는 것이다. 뜨거울 때 먹어야 음식은 맛있다. 하지만 뜨거운 것에 입천장을 데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당장 내가 먹이고 싶은 음식이 아니라, 잠이 더 절실한 아이를 기다려 줄 수 있을 때, 옥죄던 간섭과 부담은 너른 사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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