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원과 전준호, 세상의 저편, 2012년, 2채널 HD 영상과 음향, 13분 35초, 카셀 도쿠멘타 설치 장면.

미술가 듀오 문경원(1969~)과 전준호(1969~)가 2012년 독일 카셀 도쿠멘타에서 영상 작품 ’세상의 저편’을 선보였다. 나란히 설치된 두 스크린은 서로 완전히 동떨어진 세상에서 살아가는 남녀를 각각 보여준다. 배우 이정재가 연기한 남자는 흙먼지가 날릴 듯 낡고 쇠락한 공간에서 종말을 눈앞에 두고도 마지막까지 예술을 추구하는 미술가다. 배우 임수정이 분(扮)한 여자는 멸균 실험실 같은 공간에서 기계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미래의 신인류다. 두 세계의 단절은 색감을 통해서도 명징하게 드러난다. 창밖에서 어렴풋이 오렌지빛 석양이 들어오는 남자의 세상은 그나마 온기가 있지만, 여자의 공간은 차고 푸르고 날카로운 형광빛 일색이다.

‘세상의 저편’은 문경원과 전준호의 장기 프로젝트 ‘미지에서 온 소식’의 일부다. ‘미지에서 온 소식’은 19세기 말 영국 예술가 윌리엄 모리스의 소설 제목이다. 유토피아 서사의 효시인 이 소설에서 모리스는 먼 미래에 혁명이 일어난 다음 도래할 이상 사회를 묘사했다. 모리스의 시각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문경원과 전준호는 기술 발전과 자본주의의 폐해가 불러올 문명의 종말 이후를 상상한다. 과거 모리스는 혁명으로 사회문제를 척결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전쟁과 대량 살상, 기후 위기, 생태 교란 등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문제에 직면한 21세기의 미술가들은 더 이상 이상향을 바라지 않는다.

13분 남짓한 영상 말미에 여자는 우연히 시공간을 초월해 남자가 남긴 작품을 접하고, 이를 통해 희미하게나마 이미 사라져 버린 자연의 존재와 예술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인간이 만든 기계의 위력에 점점 압도되는 세상에서 예술은 과연 언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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